변안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oguma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Toguma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38번째 줄:
우왕 6년([[1380년]])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로서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 류실 등과 함께 운봉(雲峰), 황산(荒山),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한 뒤,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그 세력이 [[임견미]](林堅味)·[[이인임]](李仁任) 등과 겨룰 만큼 커졌다. 우왕은 황산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변안렬과 이성계에게 금 50냥씩, 왕복명 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냥씩을 주었으나, 모두 다 사퇴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대승리를 거두었는데 냇물이 발갛게 되어 6, 7일이나 그 색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고 그릇에 담아서 맑아지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마실 수 있었다. 노획한 마필이 1,600여 필이고, 기타 무기는 헤아릴 수 없었다. 지인 김국을 파견하여 승전을 보고했더니, 신우는 기뻐서 밀직사 인원보를 보내어 궁중에서 술을 주어서 위로하고, 김국에게 낭장 벼슬과 말 1필을 주었다. 처음에 적의 병력이 아군의 10배나 많았지만 70여명이 겨우 살아 지리산으로 도망쳤다.<ref>변안렬전에 수록된 황산대첩에는 변안렬의 전공보다는 이성계의 전공이 확대돼 있다. 전공의 평가는 동일하게 받았고 황산대첩에서 변안렬은 도체찰사(정1품)이고, 이성계는 도순찰사(정2품)인데 지휘체계가 모호하다. 이는 도체찰사와 도순찰사의 품계는 고려 시대에는 없었고, 조선 성종 대에 품계가 정해졌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또한 이성계는 3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이다. 변안렬전에 묘사된 이성계의 전공은 독자적인 전공위주로 나오는데, 지휘관이 결심하는 합동작전의 내용이 없지만 황산대첩은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노획할 수 있을 정도의 전면전적인 대규모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황산대첩후 변안렬은 이성계와 최고의 포상을 받았다. 변안열은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한 고려우왕 조정의측의 안전판으로도 볼 수 있다.</ref><ref><고려사, 변안렬전></ref><ref>저서 '대은 변안렬의 생애와 업적'<한국역사문화원></ref>
{{참고|황산대첩|설명=황산대첩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