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씨 (무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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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카시게 사후 제16대 당주 마사치카(政親)와 제17대 당주 요시스케(義右)가 대립하면서 다시금 내분이 일어났고, 일시적으로 오토모 집안은 쇠퇴하였다. [[메이오]](明応) 5년([[1496년]]) 5월에는 오토모 마사치카(大友政親)가 자신의 친아들인 오토모 요시스케를 독살하고 6월에는 마사치카가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에게 내몰려 자결하게 되면서 오토모 씨는 멸망의 위기에 서게 된다(요시스케의 어머니는 오우치 씨 출신으로 요시오키와 요시스케는 동맹관계였다).
 
=== 센고쿠 시대와 쇼쿠호 시대 ===
마사치카의 이복 동생인 지카하루(親治)<ref>母は親世系大友親隆の娘ではない</ref>가 실력으로 내분을 진정시키고, 제19대 당주 요시나가(義長)를 보좌하여 히고(肥後) 진출을 완수함으로써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비약하게 된다.
 
제20대 당주 ・ 요시아키(義鑑) 때에는 히고나 지쿠고(筑後)로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덴분(天文) 19년([[1550년]])에 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으로 요시시게는 중신 쓰쿠미 미마사카(津久見美作) ・ 다구치 아키치카(田口鑑親)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로써도 유명한 제21대 당주 ・ 요시시게(義鎮),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다. 이 무렵에는 다치바나 도세쓰(立花道雪) 등 유능한 가신단의 존재의 도움도 있어 오토모 가문은 비약적으로 세력을 확대시켰다. 덴분 20년([[1551년]])에는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가신인 스에 다카후사(陶隆房,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의 모반인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으로 사망하고, 요시시게는 자신의 동생인 오토모 요시나가(大内義長)를 오우치 가문의 당주로 보내고, 기타큐슈(北九州)의 옛 오우치 영지를 토대로, 스오(周防)나 나가토(長門)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지(弘治) 3년([[1557년]])에는 요시나가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공격당하고 오우치 가문이 멸망하여 스오 ・ 나가토 방면에서의 영향력을 잃었지만, 기타큐슈에서의 권익의 대부분은 확보하였다. 나아가 소린은 기리시탄을 보호하고 자신도 개종하여 돈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서 분고 후나이(府内)<ref group="주석">현대 일본 오이타 시(大分市) 錦町 ・ 顕徳町 부근</ref>에서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는 등, 남만 문화(南蛮文化)가 꽃피웠으나, 반면 기존의 하치만 신앙(八幡信仰)이나 불교 신앙이 두터웠던 가신단과의 불화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소린은 고지 2년([[1556년]])무렵에 우가키(臼杵)의 丹生島城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근년의 연구에서는 이는 정치 기능을 전면적으로 후나이에서 이전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ref>八木直樹「十六世紀後半における豊後府内・臼杵と大友氏―城下町移転に関する再検討―」(初出:『ヒストリア』204号(2007年)/所収:八木直樹 編『シリーズ・中世西国武士の研究 第二巻 豊後大友氏』(戎光祥出版、2014年) ISBN 978-4-86403-122-6)</ref>
 
또한 소린이 일찍이 가독(家督)을 아들인 오토모 요시미치(大友義統)에게 넘겨주고 제22대 당주가 세워졌으나, 이로 해서 덴쇼(天正) 연간에는 소린 ・ 요시미치 부자의 이원정치에 번거로움과 폐단이 드러나게 되었고, 오토모 가문은 내분에서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나아가 대외전쟁에서도 겐키(元亀) 원년([[1570년]])에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에게, 덴쇼 6년([[1578년]])에는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게 대패를 맛보았다. 특히 후자의 대패는 오토모 집안의 많은 유력 무장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제까지 오토모 씨의 막하에 있던 히젠 ・ [[지쿠젠 국|지쿠젠]](筑前) ・ 지쿠고의 고쿠진(国人) 영주들이, 류조지 씨나 아키즈키 씨(秋月氏)를 필두로 서서히 오토모 씨에 대한 모반의 반기를 들었고, 오토모 씨는 위기적인 상황에 빠진다. 덴쇼 12년([[1584년]]),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 씨의 앞에서 전사하고, 지쿠고 방면에서 상황 역전을 도모하였으나, 이번에는 시마즈 씨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덴쇼 14년([[1586년]])에는 오토모 집안의 본국이었던 분고에까지 침공이 들어왔고, 옛 후나이 마을은 불타서 들판으로 변했다.
 
그러나 소린은 당시의 천하인(天下人)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자신도 그에 신종하게 되어,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九州征伐)이 개시되게 되자 시마즈 씨는 도요토미 씨와의 전투에서 완패 ・ 방축되었다. 네지로자카 전투(根白坂の戦い)이다. 오토모 씨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존속하게 되었다. 이때 소린의 적남 요시미치는 히데요시로부터 분고 1국을 안도받았다(소린 자신에게도 휴가 1국이 안도되었으나 이를 고사하였다). 요시미치는 히데요시로부터 이름자 한 자를 받아서 '''요시미치'''('''吉統''')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 가신이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다치바나 미치토라]](立花統虎)가 독립하여 도요토미 가문의 다이묘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모리 가문과도 친화하여 소린의 딸이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지쿠고 구루미筑後久留米)의 정실이 된다(자손이 있었다). 덴쇼 15년([[1587년]]) 소린이 사망한 뒤, 요시미치는 분에이의 역(文禄の役) 즉 [[임진왜란]]에서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바람에 분로쿠 9년([[1593년]])에 히데요시의 명으로 분고 영지를 개역당하였다.
 
오토모 가문의 가독을 덴쇼 20년([[1592년]])에 적남 오토모 요시노리(大友義乗)에게 넘겨주고 은거해 있던 요시미치였으나, 히데요시 사후인 [[게이초]](慶長) 5년([[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의 총대장(総大将)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지원으로 거병하고 바닷길로 분고로 쳐들어가, 당시 동군(東軍)에 가담해 있던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의 영지가 되어있던 자신의 옛 영지에 대한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시가키 성 전투(石垣原の戦い)에서 [[구로다 조스이|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의 군에 패하고 항복, 유폐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