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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또는 '''원'''(元)은 13세기 [[몽골 제국]]이 세운 국가이다. [[보르지긴]] 가문의 수장이었던 [[쿠빌라이 칸]]이 창건하였다. 그는일반적으로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몽골 제국]] 수도를중원을 카라코룸에서지배하고 대도(현재의통치한 베이징)로시기를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였으며 1268년부터 대대적인 남송 정벌을 시작했다말한다. 1279년 애산전투에서 비로소 남송을 정벌하여 역사상 최초로 중국 전체를 정복하는 이민족 국가가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았으며, 1274년과 1281년에는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원정에 나섰고, 1288년 대월 원정, 1292년 참파 원정 등 수많은 정복 전쟁을 감행하였다. 14세기 이후 후계자 쟁탈전을 거듭하여 쇠퇴하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에게 북쪽으로 밀려난다.
 
몽골인들은 몇 십년 동안 중국 북부 지방을 다스리기는 하였으나 1271년에 쿠빌라이 칸이 전통적인 중국 양식으로 왕조를 개창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국가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이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남진하여 [[남송]]을 [[애산 전투]]에서 꺾었고, 중국의 유일한 지배 왕조로 떠오르게 되었다. 중국을 모두 통일한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다른 칸국들과 관계를 끊고 현재의 중국과 몽골 지역들을 다스렸다. 원나라는 처음으로 이민족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사례이며, 1368년에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주원장]](朱元璋)의 군대에 밀려 몽골 지역으로 쫓겨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쫒겨난 이후에도 원나라 황족들은 [[북원]]을 세워 황조를 지속해나갔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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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8년]]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크토]]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대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 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홍무제|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베이징시]])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다만 이 과정을 단순히 한족의 승리, 몽골민족의 패주라는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문제가 있다. 즉 화북에서는 먼저 황하의 개수 등에 의해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일로 인해 원나라의 구심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다. 주원장이 아직 화남평정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배경이 되었다. 또한 한족의 관리 중에는 앞에서 나온 가노를 시작으로 원 왕조에 충성을 다하여 명나라군과 반란세력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많았고, [[1367년]] 명나라군에게 붙잡힌 호부상서 장욱은 주원장의 항복권고에 대해 “몸은 강남에 있어도, 마음은 삭북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청나라]]의 역사학자 조익은 원나라에 순사한 한족의 관리의 숫자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남송 다음으로 많았다고 지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