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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백제'''(百濟), '''십제'''(十濟), '''남부여'''(南扶余)는 [[대한민국한국]]의 고대국가 중 하나로, [[신라]], [[고구려]]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시조는 [[부여]]·고구려에서 피난한 온조 부족으로[[온조왕]]으로 전해지며,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인 십제국으로 시작해 6세기 초 [[근초고왕성왕 (백제)|성왕]] 때 [[마한]]을 통일했다정복했다.<ref>{{저널 인용|저자=임영진|제목=전라도 마한의 사회 성격과 백제; 전라도 마한의 사회 성격과 백제|url=https[http://www.kciyasinmoon.go.krcom/kciportalnews/mSearchSereArtiViewarticleView.kcihtml?sereArticleSearchBean.insiIdidxno=INS000011418&sereArticleSearchBean.sereId=SER000003883&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71601|총서=백제학보|권=11|날짜=2014년30997 백제 성왕 때 마한과 통합이 3월}}이루어졌다] 영암신문 [[2019년]] [[1월 18일]]</ref>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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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초기 ===
[[신라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고려김부식]] 김부식의《[[삼국사기]]》기록에 실린 온조 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에 부여 계통의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민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추모왕과 [[소서노]]의 아들이며, 최초의 이름은 십제였다.<ref>3세기 초고왕때 국호를 백제로 바꿨다.</ref> 철기 문화를 보유한 [[부여]] 부족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피난한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나, 곧 비류가 자살하자 주민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겼으로 비로소 십제(十濟)가 건국되었다. 혹은 구태가 건국 했다는 구태설화도 전해진다.
 
당시 한강 지역은 직산-천안을 중심으로한중심으로 목지국이한 [[목지국]]이 다스리던 마한의 영토로서,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과 연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설령 부여에서 한 부족이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했더라도 인구의 주축이 토착계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강유역의 재래 집단에 고구려계, 부여계, 옥저계, 예계 부족이 합류하였을 수 있지만, [[신라|신라계]], [[가야|가야계]], 중국계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왜인들이 목포, 그리고 광주와 전주 일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도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기원은 부여계 뿐만이 아니었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환단고기역사논총 제61호, 250~25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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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활동 ===
[[파일:Baekje_map_ge.jpg|섬네일|백제의 총 지배권역|380x380픽셀]]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을 일부 제압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랴오시, 산둥, 큐슈 등과 무역을 시작했다. [[양서]]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요서|랴오시]]로 진출하여 대륙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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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성왕]]은 마한 전체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여 부여 지역의 [[부소산성|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와 다툼이 발생하면서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백제 무왕|무왕]]은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한 기회주의를 펼쳤다. 이와 더불어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성을 중수했으며 고향인 전라도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다.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의[[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존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해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지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회복되어,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숙청을 통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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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파일:Baekje Ambassador.jpg|섬네일|왼쪽|<〈[[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사신의 모습<ref><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원제(元帝)인 소역(蕭繹, 505∼554)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재임시(526∼539)에 편찬한 도서(圖書) 이다</ref>]]
백제의 언어와 풍속은 고구려, [[신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활쏘기를 좋아하는 점에서 고구려와,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신라]]와 유사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참수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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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 한학 ===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472년 [[북위 (북조)|북위]]에 보낸 국서가 《[[위서 (역사서)|위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예론>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이 왜에 한학을 전하였다. 무령왕 때는 [[단양이]]·[[고안무]] 등이 왜에 유학을 전하였다. 백제의 첫 역사서는 375년에 [[고흥]]이 편찬한 《[[서기 (역사서)|서기]]》이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역사책도 있었다고 하나, 모두 잃어버렸다.
 
주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응유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좋아한다. 그중에 준수한 자는 꽤 능숙하게 문장을 짓고 음양오행을 이해하고 있다.'
 
=== 종교 ===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주서]] | 저자= 영호덕 등 |연도= 636 |장= [[:zh:s:周書/卷49#百濟|주서 권49 백제]] |인용문=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ref>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통일신라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SBN=978-89-368-0359-9 |인용문= 중국사서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 불교는 384년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ref> 응유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ref>《[[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 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ref>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는 호국사찰이다. 599년(법왕 1)에는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강제로 불태운 적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法王 ...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法王)은 ...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강제로 태워버리게 하였다.)}}</ref> 백제의 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백제 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와 신선 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한 낙랑·대방의 중국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두면서 유교를 장려했다.
 
=== 건축 ===
[[파일:오층석탑_정면.jpg|섬네일|318x318픽셀|[[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정면]]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할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유사]] | 저자= [[일연]] |연도= 1281 |장= [[:s:삼국유사/탑상/황룡사9층탑|탑상 - 황룡사9층탑]] |인용문=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將 唐 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大王 議於群臣群臣曰請工匠於鷹遊然後方可乃以寳帛請於鷹遊匠名 阿非知 受命而來經營木石伊于 龍春 一云 龍樹 幹蠱率小匠二百人(정관 17년 계묘 16일에 당 황제가 하사한 경전·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대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응유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응유에게 청하였다.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 (龍春)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ref>과 왜국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과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SBN=978-89-368-0359-9 |인용문=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이나 왜국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寺工)과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다.}}</ref>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이 건축된 기록은 있으나 고려시대에 파괴되었으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만 남아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한 곡선으로 안정감을 주며 백제의 석탑 중에 가장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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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
[[파일:백제_금동대향로.jpg|섬네일|백제 금동대향로]]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왜국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음악은 5∼6세기에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 음악이 적혀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왜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 ·각 ·공후 ·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삼국)|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왜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는 것으로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방등산가》 《선운산가》 등이 있다.
 
=== 교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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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왕조와의 관계 ===
《[[진서|진서(晉書)]]》에 따르면, 백제가 전성기였던 4세기에 근초고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였다<ref>[[:s:zh:晉書/卷009|晉書/卷009]], 簡文皇帝...咸安...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ref>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투쟁하려고 하는 백제의 사대주의적 외교는 침류왕 대에도 계속되었다. 침류왕 원년 7월에도 백제는 동진에 조공하였다. 게다가 음력 9월에 [[동진]]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오자, 궁중에 머물게 하고 하늘처럼 대접하였다. 470년, [[송 (남조)|송 왕조]] 시기에도 사신을 보냈으며, 472년에는 [[북위 (북조)|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무령왕과 성왕은 [[양 (남조)|양나라]]에 여러 차례 조공을 보내는 대가로 양나라 귀족 칭호를 하사받았다.
 
==== 대륙백제 제국설요서경략설 ====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진평군과 진평현에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4세기부터 6세기 초 혹은 중엽까지 대략 200년간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는 가설이다.<ref>출처: 환단사강좌 - 1. 고대편, 이기백. 이기동</ref> 이러한 상상은근거는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 지방 점령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다만기록이나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정복했다고 서술하고 있었으나 1990년 이후부터는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부정하는 것이 정설이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상업적·군사적인 일시적 진출로 본다.<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한편으로 [[환단고기]] 등의 [[의사 역사학]]을 주장하는 재야사학자들은 백제의 대륙 진출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 강역에 대해서도 랴오시 지방뿐 아니라 산둥 반도 등 중국 곳곳으로 과장되게 비정하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정복했다고 서술하고 있었으나 1990년 이후부터는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
 
대륙요서 정복진출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륙 정복 시기는 [[진 (위진남북조)|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중국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는 근구수왕 때, [[정인보]]는 살해당한 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매우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ref>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부정하는 것이 정설이다.<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하지만 최근 들어서 [[환단고기]] 등을 지지하는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에 의해 백제의 대륙 진출을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대륙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와 [[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대륙백제의 중국 통치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 기병이기병의 백제를 점령했으나공격을 다시백제가 막아낸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대륙백제가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편이며,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대륙백제를백제를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매우 많다.<ref>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37쪽</ref>
대륙 정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륙 정복 시기는 [[진 (위진남북조)|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중국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는 근구수왕 때, [[정인보]]는 살해당한 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매우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ref>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의 기병이 백제를 점령했으나 다시 막아낸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대륙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편이며,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대륙백제를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매우 많다.<ref>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37쪽</ref>
 
=== 왜국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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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umida Hatiman Mirror.JPG|섬네일|200px|[[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七|卷第十七 繼體天皇]] |인용문=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ref> 와 [[516년]] [[고안무]](高安茂)<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巻第十七|巻第十七 継体天皇]] |인용문=十年夏五月 ... 別貢五経博士漢高安茂、}}</ref> 를 왜국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왜국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 (백제)|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ref>{{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ref>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세계 종교사 입문 | 저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도= 2003 |출판사=청년사 |쪽= 229 |ISBN=89-7278-376-5 |인용문=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ref>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SBN=89-349-1654-0 |쪽= 74 |인용문 =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ref><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SBN=89-86361-32-9 |쪽= 92 |인용문 =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ref>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巻第十九|巻第十九 欽明天皇]] |인용문=十三年...冬十月、百済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献釈迦仏金銅像一軀・幡蓋若干・経論若干巻。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ref>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ref>{{서적 인용 | 저자 =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SBN=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ref>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SBN=89-5645-088-9|쪽= 28 |인용문=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해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ref>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cw}}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왜국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파일:Prince Shotoku.jpg|섬네일|200px|백제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쇼토쿠 태자]]와 동생(왼쪽: 에구리 황자)과 장남(오른쪽: 야마시로 황손),8세기 목판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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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패망과 왜의 참전 ====
{{본문|백강전투}}
[[의자왕]] 13년(653년) 백제는 왜와 우호를 통하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28|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 十三年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653) ...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ref>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진배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 멸망하였다. 이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부여풍]]을 임시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풍은 [[631년]] 인질로서 [[왜국]]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巻第廿三|巻第廿三 舒明天皇]] |인용문=三年...三月庚申朔、百済王義慈入王子豊章為質。 }}</ref>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8/의자왕|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豐)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ref> 고 기록한다.<ref>{{서적 인용 |저자=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3 |연도= 2001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SBN=89-86361-55-8 |쪽= 76 |인용문 = 『일본서기』는 “서명기(舒明紀) 3년(631),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百済王義慈入王子豊章為質)”고 적고 있다〔『일본서기』의 서명기(舒明紀) 3년은 무왕(武王) 32년으로, 이때는 아직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지 않았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질(人質)’이라는 의미의 ‘질(質 )’이다. 「백제본기」도 661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고 기록한다. 왜에 있던 부여풍이 망국을 부흥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역시 ‘질(質)’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풍은 631년에서 661년까지 30년간 왜에 인질로 있었다. }}</ref> 부흥군과 [[부여풍]]은 왜의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병력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663년 8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풍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풍이 전라도에서 복신을 살해한 뒤, 풍은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 지도부가 분열하고 있을 때 [[신라]]는 서둘러 부흥군을 진압하였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문무대왕]]이 이끄는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태자였던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노병들이 진을 쳤고, 바다에서는 왜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선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참패했다. 게다가 다른 한쪽에서는 왜의 수군이 [[신라]]군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격퇴됨으로써,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강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