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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백제'''(百濟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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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초기 ===
[[
《[[삼국사기]]》의 백제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피난한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나, 곧 비류가 자살하자 주민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겼으로 비로소 십제(十濟)가 건국되었다. 혹은 구태가 건국 했다는 구태설화도 전해진다.
당시 한강 지역은 직산-천안을
그러나 설령 부여에서 한 부족이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했더라도 인구의 주축이 토착계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강유역의 재래 집단에 고구려계, 부여계, 옥저계, 예계 부족이 합류하였을 수 있지만, [[신라|신라계]], [[가야|가야계]], 중국계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왜인들이 목포, 그리고 광주와 전주 일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도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기원은 부여계 뿐만이 아니었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환단고기역사논총 제61호, 250~25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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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활동 ===
[[파일:Baekje_map_ge.jpg|섬네일|백제의 총 지배권역|380x380픽셀]]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을 일부 제압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랴오시, 산둥, 큐슈 등과 무역을 시작했다. [[양서]]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요서|랴오시]]로 진출하여 대륙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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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성왕]]은 마한 전체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여 부여 지역의 [[부소산성|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와 다툼이 발생하면서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백제 무왕|무왕]]은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한 기회주의를 펼쳤다. 이와 더불어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성을 중수했으며 고향인 전라도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회복되어,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숙청을 통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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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파일:Baekje Ambassador.jpg|섬네일|왼쪽|
백제의 언어와 풍속은 고구려, [[신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활쏘기를 좋아하는 점에서 고구려와,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신라]]와 유사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참수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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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 한학 ===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472년 [[북위 (북조)|북위]]에 보낸 국서가 《[[위서 (역사서)|위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주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응유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좋아한다. 그중에 준수한 자는 꽤 능숙하게 문장을 짓고 음양오행을 이해하고 있다.'
=== 종교 ===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주서]] | 저자= 영호덕 등 |연도= 636 |장= [[:zh:s:周書/卷49#百濟|주서 권49 백제]] |인용문=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ref>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통일신라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SBN=978-89-368-0359-9 |인용문= 중국사서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 불교는 384년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ref> 응유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ref>《[[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 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ref>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는 호국사찰이다. 599년(법왕 1)에는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강제로 불태운 적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法王 ...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法王)은 ...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강제로 태워버리게 하였다.)}}</ref> 백제의 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 건축 ===
[[파일:오층석탑_정면.jpg|섬네일|318x318픽셀|[[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정면]]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할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유사]] | 저자= [[일연]] |연도= 1281 |장= [[:s:삼국유사/탑상/황룡사9층탑|탑상 - 황룡사9층탑]] |인용문=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將 唐 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大王 議於群臣群臣曰請工匠於鷹遊然後方可乃以寳帛請於鷹遊匠名 阿非知 受命而來經營木石伊于 龍春 一云 龍樹 幹蠱率小匠二百人(정관 17년 계묘 16일에 당 황제가 하사한 경전·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대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응유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응유에게 청하였다.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 (龍春)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ref>과 왜국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과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SBN=978-89-368-0359-9 |인용문=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이나 왜국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寺工)과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다.}}</ref>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이 건축된 기록은 있으나 고려시대에 파괴되었으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만 남아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한 곡선으로 안정감을 주며 백제의 석탑 중에 가장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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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
[[파일:백제_금동대향로.jpg|섬네일|백제 금동대향로]]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왜국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음악은 5∼6세기에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 음악이 적혀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왜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 ·각 ·공후 ·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삼국)|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왜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 교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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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왕조와의 관계 ===
《[[진서
====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부정하는 것이 정설이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상업적·군사적인 일시적 진출로 본다.<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한편으로 [[환단고기]] 등의 [[의사 역사학]]을 주장하는 재야사학자들은 백제의 대륙 진출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 강역에 대해서도 랴오시 지방뿐 아니라 산둥 반도 등 중국 곳곳으로 과장되게 비정하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
▲대륙 정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륙 정복 시기는 [[진 (위진남북조)|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중국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는 근구수왕 때, [[정인보]]는 살해당한 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매우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ref>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의 기병이 백제를 점령했으나 다시 막아낸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대륙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편이며,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대륙백제를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매우 많다.<ref>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37쪽</ref>
=== 왜국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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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umida Hatiman Mirror.JPG|섬네일|200px|[[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七|卷第十七 繼體天皇]] |인용문=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ref>
[[파일:Prince Shotoku.jpg|섬네일|200px|백제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쇼토쿠 태자]]와 동생(왼쪽: 에구리 황자)과 장남(오른쪽: 야마시로 황손),8세기 목판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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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패망과 왜의 참전 ====
{{본문|백강전투}}
[[의자왕]] 13년(653년) 백제는 왜와 우호를 통하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28|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 十三年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653) ...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ref>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진배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 멸망하였다. 이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부여풍]]을 임시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풍은 [[631년]] 인질로서 [[왜국]]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巻第廿三|巻第廿三 舒明天皇]] |인용문=三年...三月庚申朔、百済王義慈入王子豊章為質。 }}</ref>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8/의자왕|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豐)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ref> 고 기록한다.<ref>{{서적 인용 |저자=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3 |연도= 2001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SBN=89-86361-55-8 |쪽= 76 |인용문 = 『일본서기』는 “서명기(舒明紀) 3년(631),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百済王義慈入王子豊章為質)”고 적고 있다〔『일본서기』의 서명기(舒明紀) 3년은 무왕(武王) 32년으로, 이때는 아직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지 않았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질(人質)’이라는 의미의 ‘질(質 )’이다. 「백제본기」도 661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고 기록한다. 왜에 있던 부여풍이 망국을 부흥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역시 ‘질(質)’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풍은 631년에서 661년까지 30년간 왜에 인질로 있었다. }}</ref> 부흥군과 [[부여풍]]은 왜의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병력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663년 8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풍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풍이 전라도에서 복신을 살해한 뒤, 풍은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 지도부가 분열하고 있을 때 [[신라]]는 서둘러 부흥군을 진압하였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문무대왕]]이 이끄는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태자였던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노병들이 진을 쳤고, 바다에서는 왜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선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참패했다. 게다가 다른 한쪽에서는 왜의 수군이 [[신라]]군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격퇴됨으로써,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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