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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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식 표현으로 |
유연은 좌부수가 맞습니다. 이 당시 흉노는 5부 체제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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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산시 성 (산서성)|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정착하여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번병(番兵)의 역할을 하였다. 3세기 말, [[팔왕의 난]] 이 일어나 [[서진]](西晉)이 혼란에 빠지고, 남흉노의
업의 사마영(司馬穎)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유연은 사마영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사마영을 속이고 업에서 빠져나와 흉노의 거주지인 병주(并州)로 향했다. 병주의 이석(離石)에서 거병한 유연은 [[304년]] 10월에 한(漢)을 건국하였다. 흉노와 한나라는 [[기원전 2세기]]에 형제의 맹약을 하였는데, 유연은 이 형제의 맹세를 근거로 이미 멸망한 형 한나라의 뒤를 이어 동생 흉노가 한나라를 건국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연은 한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왕실의 후예을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자손은 [[성한]](成漢)으로 도망친 [[유현 (4세기)|유현]](劉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 (전조)|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 중남부를 점령하고 서진의 수도 낙양을 압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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