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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전개 ===
'''필리오케'''({{llang|la|Filióque}})란 'and the Son(그리고 아들)'라는 뜻의 [[라틴어]]로, 본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채택된 것으로 알려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하 '[[신조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니케아 신경]]'이라 함)의 [[그리스어]] 원문에 없는 단어이나 [[589년]] 제3차 [[톨레도]] [[시노드]]에서 아직 [[스페인]] 내에 잔존하고 있었던 [[아리우스주의]]를 경계할 의도로 [[서방교회]]가 [[라틴어]]로 번역한 니케아 신경에 처음으로 첨가하였다. 이는 당시 기독교회의 신학 표준 언어가 코이네 그리스어인 상황에서 번역어인 라틴어의 문제였고, 중요한 신앙의 기준인 니케아 신경의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았던 문제이며, 신학적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코이네 그리스어, 헬라어 니케아 신경 원문 중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토 에크 투 파트로스 에크포류오메논<ref>코이네 그리스어 발음을 따름.</ref>, 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라는 구절은 라틴어 번역본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삼위일체)|성자]]에게서 발하시고'''(크비 엑스 파트레 필리오크베 프로체디트<ref>교회라틴어 발음을 따름</ref>, 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게 되어,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 니케아 신경과 서방 교회에서 번역한 라틴어 니케아 신경 간에 불일치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필리오케가 삽입된 니케아 신경은 [[스페인]] 내에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 [[796년]] 프리울리 시노드에서 [[프랑크 왕국]] 아킬레이아의 파울리노 [[총대주교]]는 필리오케의 니케아 신경 삽입을 옹호하였고, [[800년]]경에는 전체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필리오케가 삽입된 니케아 신경이 암송되기 시작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847년]] 프랑크왕국의 [[수도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소개되자 동방교회 수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 문제가 [[교황 레오 3세|레오 3세]]에게 와서, [[레오 3세]]는 필리오케의 신학적 문제점보다 번역의 문제와 교회 일치의 문제점으로 보고, 809년 라틴어 번역본에 필리오케 추가를 막고자 하였고, 그는 필리오케가 없는 형태의 니케아 신경을 [[코이네 그리스어]] 원문과 [[라틴어]] 번역문으로 각각 작성하여 [[성 베드로]]의 묘에 봉헌된 은제 탁자 2개에 새겨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레오3세의 의도와 달리, 널리 사용된다는 이유로 신학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교황 베네딕토 8세|베네딕토 8세]]는 [[1013년]] 필리오케가 삽입된 라틴어 니케아 신경을 다시 거론하여 승인하기에 이른다.
 
이에 서방교회에게 필리오케를 니케아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 시대 이후로, 필리오케는 [[교황]] 수위권(首位權) 논쟁 등 여타의 신학적 문제와 더불어 동·서방 교회 갈등의 한 요인이 되었다.
 
=== 역사적 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