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둥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역사: 봇 ; 작업9 수행중 ; 오류제보는 여기로 using AWB
잔글 →‎역사: 봇 ; 작업9 수행중 ; 오류제보는 여기로 using AWB
29번째 줄:
1683년, [[청나라]]에 의해 타이완의 [[정씨왕국]] 평정되면서 청은 시랑의를 파견하고, 대하도경리 및 그 아래에 1부 3현을 설치했지만, 타이완 동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통치를 실시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을 얻지 못했다. 당초에는 정씨정권의 통치 체제를 답습해 1696년에는 비남멱 등 65사가 입공 했고, 대청자민(大清子民)으로서의 지위를 주고 비남왕에 책봉한 일로 타이완 동부의 명의적인 통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의 관리가 실제로 동부에 진출한 것은 1721년, 주한귀의 반란을 접하면서이다. 청은 그 잔당과 뒤쫓기 위해 타이완 동부로 정유호, 임천작 및 통역가인 장왕을 비남멱에 파견했고, 현지의 사의 협력을 얻어 주한귀의 잔당을 붙잡았다.
 
[[가경]] 연간이 되면서, 타이완 섬의 인구는 200만명을 넘었고 서부 평야는 개발이 다 되어, 이후 타이완 동부로의 진출이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1804년에 [[핑둥 현|병동]] [[류추 향|소유구]]의 진필처가 화소도(현재의 [[루다오 섬]])에 상륙해 공관을 건설한 것이 한족의 동부 개척의 시작이다. 1820년 무렵이 되면서, 소유구의 어민 30여명이 화소도에 상륙해 중료(中寮)라는 취락을 형성하는 등, 착실하게 이주가 진행되었다. 1860년경이 되면 수저료(水底寮, 현재의 [[핑둥 현]] [[팡랴오 향]])의 상인인 정상개가 대동평야로 이주 해 벼농사를 시작했고, 또 보상장이라는 거점을 구축해 현재의 타이둥 시의 발상이 되었다. 그 후에도 후자란(猴仔蘭), 지본(知本), 여가(呂家), 비남(卑南), 이롱(里壟, 현재의 [[관산 진]]), 성광오(成廣澳, 현재의 청궁 소항)으로의 이주가 진행되어, 1873년에는 타구(현재의 [[가오슝 시가오슝시]])와의 사이에 우편선이 설치되었다.
 
1871년, [[모란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태풍으로 타이완 동부에 [[류큐]] 어선이 표착해, 66명이 항춘반도의 팔요만에 상륙했지만 모란사의 주민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당시 류큐의 종주권 문제로 청과 대립하고 있던 일본 정부가 타이완 지역으로 출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측에서 사건의 처리를 담당한 복건 해방대신 심보정은 일본군 철병 후에 타이완 경영에 착수해,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타이완 동부 지구가 자원이 풍부한 지역임을 보고함과 동시에, 그 방위의 중요성을 건의해 청의 적극적인 동부 개발이 진행되었다. 1875년에는 대남에 설치되어 있던 남로무민리번 동지이찰을 비남으로 옮겼고, 그 아래에 무간국, 비남청을 설치해 타이완 동부의 직접 통치에 착수하였다. 또 1877년에는 [[루다오 섬]], [[란위 섬]]을 정식으로 청의 판도에 편입하고 1884년에는 [[타이완 성]]을 신설하는 등 통치 체제가 착실하게 타이둥 지역으로 침투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