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고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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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겐무의 난이 발생할 때까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매우 총애하였다.<ref name="hanada62">花田 2016, pp. 189–191.</ref><ref group="주석">한편으로 사학자 호소카와 시게오(細川重男)는 고다이고 천황이 다카우지를 총애하고 우대한 것은 그저 「장기말」의 하나로써였을 뿐이고 마음속까지 그를 신임하고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고 하였다(細川 2016, pp. 102–103).</ref> 다카우지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다카우지」(高氏)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이름자 한 자를 받은 것이었다. 겐코(元弘) 3년/쇼쿄(正慶) 2년(1333년)8월 5일에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천황의 본명 「다카하루」(尊治)의 이름자 한 자 「다카」(尊)를 하사받아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라는 이름을 받기도 하였다.<ref>[https://clioimg.hi.u-tokyo.ac.jp/viewer/view/idata/850/8500/02/0601/0170 『大日本史料』6編1冊170–181頁.]</ref> 겐코의 난 이후의 군공 인정은 다카우지와 모리요시 친왕(고다이고 천황의 친아들)이 맡았는데, 모리요시 친왕이 독자적인 권한으로 인정된 것에 비해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충실한 대행자로써 모리요시 친왕 이상의 근면함으로 군공을 인정받았고<ref>吉原 2002, pp. 41–44.</ref>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에게 30개 소의 토지<ref name="hanada66">花田 2016, pp. 187–189.</ref> 그리고 진주후쇼군 ・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 무사시노카미(武蔵守) ・ 산기(参議) 등 중요 관직을 아낌없이 주었으며<ref name="hanada62"></ref> 나아가 진주후쇼군으로써 겐무 정권의 전군 지휘권을 위임받고 정치의 중추에 편입되었다.<ref name="yoshiwara67">吉原 2002, pp. 48–51.</ref> 진주후쇼군은 장식뿐인 지위가 아니라 다카우지가 규슈에서의 호조 씨 잔당 토벌 등의 때에 실제로 이들의 권한을 행사하였다.<ref name="yoshiwara67"></ref> 동생 다다요시 또한 15개 소의 토지<ref name="hanada66"></ref> 그리고 가마쿠라 쇼군후(鎌倉将軍府)의 싯켄(실질적인 간토의 지도자) 등에 임명되었다. 한편 『매송론』(梅松論)에 기록되어 있는, 구게들이 「無高氏(尊氏なし)」라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사건은 이전에는 다카우지가 정치 중추로부터 배제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었는데, 요시하라 히로미치(吉原弘道)는 신연구의 성과에 힘입어, 다카우지가 받았던 이례적인 후대를 구게들이 질투하고자 묘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해석하고 있다.<ref>吉原 2002, p. 52.</ref>
 
고다이고 천황은 이미 무너뜨린 가마쿠라 막부의 도쿠소(得宗) 호조 다카토키에 대해서는 그 명복을 빌며 겐무 2년([[1335년]]) 3월 무렵 그의 복심인 다카우지에게 명하여 가마쿠라의 다카토키의 옛 저택에 호케이지(宝戒寺)를 세울 것을 계획하였다.<ref name="각주69">「神奈川県:鎌倉市 > 小町村 > 宝戒寺」 『日本歴史地名大系』 平凡社、2006年。</ref>[注釈<ref 8]group="주석">足利尊氏寄進状建武2年(1335年)3月28日付(『神奈川県史』資料編3에 실림)</ref> 그 후 전란으로 호케이지 건립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 1350–1352)을 제압하고 막부의 실권을 쥐게 된 다카우지는 엔칸(円観)의 명의상의 개산(開山, 2세 유현惟賢을 실질적인 개산으로 한다)으로 해서 쇼헤이(正平) 8년/분나(文和) 2년([[1353년]] 봄 무렵부터 재개하여, 이듬해 무렵에는 완성시키고 고다이고 천황의 유지를 완수하였다.<ref name="각주69"></ref><ref group="주석">「将軍足利尊氏寄進状案」「将軍足利尊氏御教書案」(『神奈川県史』資料編3所収)、「惟賢灌頂授与記」(『鎌倉市史』史料編1所収)</ref> 또한 다카토키의 어린 아들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는 나카센다이의 난에서 일시 고다이고 천황에게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훗날 남북조 내란이 시작되자 다카우지가 아닌 고다이고 편에 서기를 바랐고, 고다이고 천황도 이를 허락하여 유력 무장으로 중용되었다.<ref>鈴木由美 「【北条氏と南朝】5 鎌倉幕府滅亡後も、戦いつづけた北条一族」、日本史史料研究会; 呉座勇一編 『南朝研究の最前線 : ここまでわかった「建武政権」から後南朝まで』 洋泉社〈歴史新書y〉、2016年、110–128頁。ISBN 978-4800310071。. pp. 119–126.</ref>
 
그렇다고 해서 고다이고 천황에 끝까지 대립을 지속한 무가 씨족에 대해서까지 겐무 정권이 신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ref name="mori71">森 2016, pp. 79–82.</ref> 예를 들어 셋쓰 씨(摂津氏) ・ 마쓰다 씨(松田氏) ・ 사이토 씨(斎藤氏) 등은 가마쿠라 막부 ・ 로쿠하라 단다이에 대대로 실무 관료를 맡아왔던 씨족으로 능력으로써는 고다이고 천황이 선호할 만한 부유였을 텐데도 호조 씨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쳤으므로 몇 사람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겐무 정권 아래서 거의 등용되지 않았다.<ref name="mori7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