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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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파일:WarringStatesChinaKoreanmap.png|350px|섬네일|오른쪽|기원전 260년 후반의 [[전국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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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나라 봉건제도의 붕괴 ==
한·위·조가 후(侯)라고 칭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라 주왕이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종법제(宗法制)를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배경에 있기에 그 맥락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이윽고 강력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王)을 칭하게 됨으로 이 때부터 명실공히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그 시기까지 중원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적 질서와 정치적 균형을 유지시켜오던 봉건제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결국 붕괴되어 버리는 시발점이 된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각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거기에 춘추 시대 초창기부터 주나라의 권위에 불복하던 초나라도 이시기즘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 와서 7개 강대국 중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함으로 인해 비로소 중원은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強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또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당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전국 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 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서주(西周)로부터 춘추 시대에 걸쳐서는 정치·군사 양면에 있어서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전국 시대가 되자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저마다의 책임자가 필요에 따라서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주권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시기에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들이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 모두 다 그러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고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해 중원 전체의 공감대와 유대감을 조성하는 공통된 문화·사상이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오로지 자기의 영지(領地)와 그 이익관계 속에서만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제한되고 단절된 당시 대부 계층의 보수적 시대관 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