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룸 로마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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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왕정 시기 ===
[[파일:Tavares.Forum.Romanum.redux.jpg|섬네일|250px|포룸 로마눔의 전경]]
원래 포룸 로마눔이 있던 곳은 풀들만 무성하게 자라는 습한 저지대였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 경7세기경 거대한 간척 사업이 진행되었고, 점차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이 곳은이곳은 로마를 세운 전설적인 왕 [[로물루스]]와도 관계가 있다. 당시 로마는 로물루스와 티투스 타티우스, 이 두 사람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티투스 타티우스는 [[캄피돌리오 언덕]]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포룸 로마눔은 두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은이곳은 자연스레 두 세력이 서로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그 때그때 포룸 남쪽 부분은 물웅덩이들이 군데군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북쪽 부분에서 만나 교류했다. 이 곳에서이곳에서 그들은 무기를 들고 나올 수 없었고 서로 싸울 수도 없었다.
 
포룸은 [[사비니|사비니 족사비니족]]의 요새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요새는 로마인들이 연합하여 공격했을 때 대부분 파괴되거나 헐려 나갔다. 로마 시가 점차 커지기 시작하자, 포룸 로마눔은 점차 거대한 시장으로 변해갔다. 정치가들은 점차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 곳의이곳의 용이성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이 곳은이곳은 정치적 집회나 재판과 같은 공공 행사들이 점점 더 많이 열리기 시작했다. 점차 강성해지는 로마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이 곳에이곳에 더 많은 정부 건물들이 들어섰다. 로마의 두 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이 곳에서이곳에서 최초로 [[베스타 신전|베스타 여신]]을 섬기는 의식을 시작했다. 그는 이 곳에이곳에 여사제들을 위한 거처들을 지었고, 그의 왕궁 또한 이 곳에이곳에 지었다.
 
=== 로마 공화정 시기 ===
로마의 왕들이 쫒겨나고 공화정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포룸 로마눔은 여전히 로마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다만 이 곳에는이곳에는 전보다 더 큰 공공 광장이 만들어졌고, 개인 주택들을 밀어내고 공공 정부 건물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몇몇 집정관들이 이때 세운 포룸의 기본적인 구조가 나중에 제정 시기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갔다. 기원전 5세기 경5세기경,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건물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사투르누스]] 신전, [[디오스쿠로이|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등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콩코르드콩코르디아 신전이 세워졌다. 이 곳에서이곳에서 연설가들은 포룸의 북쪽 부분에 앉아있는 원로원 의원들과 귀족들을 바라보며 연설을 하는 전통이 생겼다. 기원전 80년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술라]]가 포룸의 바닥에 대리석으로 판석을 깔았다. 이 판석은 거의 제정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78년에는 이 곳에이곳에 공공 기록관이 정식으로 세워졌고, 기원전 63년에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키케로]]가 이 곳에서이곳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기원전 44년, 이 곳에서이곳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가 그의 장례 연설을 했다. 카이사르의 시신은 이 곳으로이곳으로 운구되어 화장되었고,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기리는 신전을 지었다. 나중에 안토니우스는 키케로를 죽인 후 그의 머리와 오른손을 잘라 대중들이 볼 수 있게 이 곳에이곳에 걸어놓았다.
 
=== 로마 제국 시기 ===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일어난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전역을 확고히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포룸에 추가적인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아치와 디부스 율리우스 신전을 지었다. 69년에 늙은 황제 [[갈바]]가 이곳에서 반란군에게 암살당해 죽었다. 그는 제국 전역에서 반란과 음모가 들끓자 당황하여 급히 피신하려 하였으나, [[오토]] 장군이 이끌던 기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초기 제정 시기에, 이 곳에서이곳에서 이루어지던 대부분의 경제적, 사법적 업무들은 트라야누스의[[트라야누스 포룸과포룸]]과 같은 더 거대하고 전문적인 건물들로 옮겨갔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 203년에 백색 대리석으로 포룸의 북서쪽에 지어졌다. 당시 세베루스 황제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왔고, 원로원과 시민들은 그에게 개선문을 세워줘 그의 공적을 기리기로 합의했다. 이 개선문은 아직까지도 남아있고, 가장 눈에 잘띄는잘 띄는 유적들 중 하나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도 로마 시내 전체를 다시 설계하며 포룸 로마눔도 같이 리모델링하였다. 이 때이때 포룸 로마눔에 영화로운 기념관들, 신전들이 다시 새롭게 지어졌고, 불타버렸던 베스타 신전도 이때 다시 재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 하에 포룸 로마눔은 마지막 전성기를 맞는다. 이 때에 쇠퇴해가던 서로마 제국의 정치력이 대부분 이 곳으로 다시 모여들었으며, 이후 200년 후에 [[오도아케르]]에 의해 제국이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 포룸 로마눔은 로마 제국의 상징적 중심지로 남아있게 된다.
 
=== 중세 ===
제국이 쇠퇴하고 결국에는 끝내 망하면서, 한때 80만 명에 달하던 로마 시의 인구는 500년에는 25만 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사람들은 포룸에 세워져 있던 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와 같은 시도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고, 6세기 들어 포룸 내의 건물들 일부는 서서히 성당으로 변하게 된다. 608년에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포카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돌기둥이 하나 세워졌고, 이 것이이것이 포룸에 추가된 마지막 건물이었다. 665년에 로마를 방문한 동로마의 황제는 이 곳에이곳에 있던 납 지붕들과 신전들을 통째로 뜯어갔고, 이는 안그래도 심각했던 풍화와 침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8세기8세기경 경 이 곳은이곳은 성당과 교회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다. 8세기에 이 곳을이곳을 여행했던 익명의 스위스 방랑자는 그의 시대에도 이미 이 곳은 완전한 폐허였다고 말한다. 중세 시기 거의 대부분 동안 이 곳은이곳은 대리석 조각들에 파묻힌 채로 부서져 갔고, 사람들은 점차 옛 영광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교황 [[교황 우르바노 5세|우르바노 5세]]가 [[아비뇽]]에서 다시 돌아오며, 사람들은 황폐했던 교황궁과 성당들을 복구하기 위해 포룸 로마눔에 다시 관심을 쏟게 된다. 그들은 이 곳에이곳에 간신히 남아있던 기둥들과 유적들을 대부분 떼어갔으며, 무자비한 채석을 감행했다.
 
=== 발굴과 보존 ===
17세기에서 19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과 고고학자들이 이 곳을이곳을 거쳐갔다. 그들은 이 곳의이곳의 옛 영화를 그리워했으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 작품들 중 몇몇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어 현재의 보존과 복원 작업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1803년에 한 고고학자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쌓여있던 잔해들을 치웠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포룸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1898년에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크게 3개의 목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첫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둥, 잔해, 조각상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 둘째 문화재들을 파손하지 않고 흙과 돌 속에 파묻혀 있는 건물들을 다시 파낼 것, 셋째 이미 발굴된 건물들의 용도와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2008년에 폭우가 내려 유적들 일부가 손상되었다. 다만 발굴 작업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2009년에는 추가적인 결과들이 출토되었다.
 
== 건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