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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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사 정보
| 이름 =
| 원어이름 = 源
| 그림 = File:Minamoto no Yoritomo.jpg
| 그림설명 = 교토 진고지(神護寺) 소장 전(傳)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초상. 근년에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초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 가몬 = Sasa rindo.svg
| 가몬설명 =
| 전임후임 = 예
| 전임후임대수 = 1
| 전임후임직책 = [[가마쿠라 막부]] [[정이대장군]]
| 전임후임임기 = [[1192년]] ~ [[11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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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규안]] 3년 [[음력 4월 8일]]([[1147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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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호 = 白旗大明神
| 계명 = 武皇嘯厚大禪門
| 묘소 = [[가나가와현]] [[
| 관위 = [[정이위]] [[권대납언]](權大納言)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 [[정이대장군]]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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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공용분류}}
{{포털|일본|역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llang|ja|源
헤이안 시대 말기의 유력한 무문(武門)이었던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도료(棟梁)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3남으로 태어나 아버지 요시토모와 함께 싸운 [[헤이지의 난|헤이지(平治)의 난]]에서 헤이시(平氏)에 패해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llang|ja|源 賴朝}}, [[1147년]] [[5월 9일]] ~ [[1199년]] [[2월 9일]])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으로,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源氏)를 이끌었던 무사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초대 [[정이대장군]]이다.
이로써 조정으로부터 반 독립적인 정권을 창출하였고, 이 정권은 그 후 소재지의 이름을 따서 '가마쿠라 막부'로 불리었다. 이러한 '[[막부]]'에 의한 무가정권은 [[
▲헤이안 시대 말기의 유력한 무문(武門)이었던 [[가와치 겐지]]의 도료(棟梁)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3남으로 태어나 아버지 요시토모와 함께 싸운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시(平氏)에 패해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황족 [[모치히토 왕]]의 영지(令旨)<ref>당에서는 황태자의 명령을 전하는 문서를 '영(令)'이라고 했지만, 일본에서는 황태자의 명령뿐 아니라 삼후(三后, 태황태후·황태후·황후)가 내는 문서도 이에 준했다. 헤이안 중기 이후로는 황태자나 삼후 이외의 황족(뇨인女院·황태자·여러 왕)의 것도 영지로 불리게 되었다.</ref>를 받고 이후 극적으로 회생,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등의 겐지들과 함께 거병해 [[간토]]의 헤이케 세력을 평정하고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삼았다. 헤이케를 쓰러뜨린 뒤, 전공이 뛰어났던 이복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요시쓰네]]를 추방해 권력을 강화했다. 또, 여러 지방에 [[슈고]]와 [[지토]]를 파견하여 힘을 키웠으며 [[오슈 전쟁]]에서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하였다. [[겐큐 (12세기)|겐큐]] 3년([[1192년]]) [[정이대장군]]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조정으로부터 반 독립적인 정권을 창출하였고, 이 정권은 그 후 소재지의 이름을 따서 '가마쿠라 막부'로 불리었다. 이러한 '[[막부]]'에 의한 무가정권은 [[왕정복고 (일본)|왕정복고의 대호령]]이 행해지는 [[게이오]] 3년([[1868년]])까지 약 680년간 지속되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 ====
규안(久安) 3년 4월 8일에 미나모토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이자 적자(嫡子)로서 [[
아버지 요시토모는 [[세이와 천황]]을 시조로 하며, [[
==== 유년기와 소년기 ====
호겐의 난 이후, 니조 천황을 지지하는 친정파와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는 인세이파가 대립하고, 친정파로서 급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가던 신제이(信西)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갔다. 요리토모의 아버지 요시토모는 [[헤이지]] 원년([[1159년]]) 12월 9일, 고시라카와 상황의 근신이었던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賴)가 주동이 된 헤이지의 난에 가세하여 산조도노(三條殿)을 습격해 불살랐다. 처음 신제이를 추토하려던 관군의 입장에서 그 은상으로 실시된 관리 임명 때, 13세의 요리토모는 우효에노스케(右兵衛權佐)<ref group="주석">이런 이유로 자라서는 '스케 나리(佐殿, すけどの)'라 불리게 된다.</ref> 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니조 천황의 측근들의 계략으로 천황은 황궁을 떠나 로쿠하라(六波羅)에 있던 기요모리의 저택으로 파천했고, 27일에 '관군'이 된 헤이시가 '조적(朝敵)' 노부요리를 황궁에서 기습했다. 이 싸움에서 노부요리파에 가담했던 요시토모는 헤이시에 패하고, 가와치 겐지 일문에게 내려졌던 관직도 모두 잃은 채 교토를 떠나야 했다.
본거지 토고쿠로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요리토모는 여덟 기를 거느리고 함께했지만, 도중에 아버지와도 떨어지고 그만 헤이시의 게닌(家人) [[다이라노 무네키요]](平宗淸)에게 붙들리고 만다. 여기에 요시토모까지 오와리에서 가신에게 배신당해 살해되고, 맏형 요시히라와 둘째형 도모나가는 처형당하거나 또는 도망치다가 부상을 입어 죽었다.<ref group="주석">요리토모 일행이 수도를 빠져나가던 당시의 상황을 여러 책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1. 군담소설 《헤이지 이야기》에 보면 일행이 오미 국에 이르렀을 때,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던 요리토모는 들길에서 그만 말등에서 조는 바람에, 일행과 떨어져 쫓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벗어나 야슈(野州)에서 일행과 합류하지만, 눈 때문에 일행이 말에서 내려 걷는 와중에 다시 일행을 놓쳐 1월 내내 아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 사이에 요시토모의 처자가 살고 있던 미노 국의 세이묘(靑墓)에 도달한 일행은 그곳에서 상처가 악화된 둘째 형 도모나가를 잃고 아버지 요시토모마저 오와리 국 노마에서 오사다 다다무네의 배반으로 살해된다. 이를 안 맏형 요시히라는 혼자서라도 기요모리를 죽이려고 교토로 돌아와 옛 가신들과 함께 변장하고 기요모리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다 붙들려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요리토모는 눈이 녹자 아사이를 떠나 세이묘를 거쳐 오와리에 도착했지만 붙잡히고 만다.(금비라계본) 또는 오미 국 오요시사(大吉寺)에 숨었다가 오미의 아사이 북군의 노부부의 도움으로 숨었으나 세키가하라에서 붙들렸다.(고태본)/2. 《청해안초(淸獬眼抄, 당시 [[게비이시]])의 심문 기록》에 보면 2월 9일 오미에서 요리토모가 붙잡혔다고 한다./3. 《아즈마카가미》는 오요시사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금비라계본 《헤이지 이야기》를 제외하면 요리토모가 미노의 세이묘에 갔다는 기재는 어디에도 없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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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스케치카(伊東祐親)의 딸 야에히메(八重姬)와 만나다 야합하여 아들 지즈루마루(千鶴丸)를 낳고, 얼마 뒤에는 현지의 호족인 호조 도키마사의 맏딸 마사코(政子)와 혼인해 맏딸 오히메(大姬)를 얻은 것도 유배생활 동안의 일이었다.<ref group="주석">혼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맏딸 오히메의 생년인 지쇼 2년([[117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ref>
소설적 허구가 많이 가미된 것으로 여겨지는 《소가 이야기》(曾我物語)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닌난]](仁安) 2년([[1167년]]) 무렵, 21세의 요리토모는 이토 스케치카의 감시하에 있었다. 이곳에서 도이 사네히라(土肥實平)나 아마노 도카게(天野遠景), 오바 가게요시(大庭景義) 등이 모여서 사냥이나 [[스모]]를 벌이곤 했는데(이들은 모두 훗날 요리토모를 섬겨 막부의 [[고케닌]]이 된다), 스케치카가 교토에 가 있는 동안 그의 셋째 딸 야에히메와 야합해 아들 지즈루마루를 두었다. 스케치카는 격노했을 뿐만 아니라, 헤이케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지즈루마루를 이토의 도메키가후치(轟ヶ淵)에 던지고 야에히메는 에마노 고지로(江間小四郞)에게 시집보내 버린 뒤, 요리토모를 토벌하려 했다. 스케치카의 차남 스케키요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요리토모는 하시리유 곤겐에게 몸을 피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요리토모의 나이 29세 무렵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31세 때, 요리토모 감시의 직무를 떠맡고 있던 호조 도키마사의 맏딸 마사코(당시 21세)와 다시 야합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도키마사는 야마키 가네타카(山木兼隆)에게 마사코를 시집보내 무마시키려 했지만, 마사코는 거절하고 밤중에 도망쳐 요리토모에게 가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 군사 활동 ===
==== 거병 ====
[[지쇼]] 4년([[1180년]]), 고시라카와 법황의 서자였던 다카쿠라노미야(高倉宮) 모치히토 왕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賴政) · 나카쓰나(仲綱) 부자의 요청으로 여러 구니의 겐지들에게 헤이시 추토를 명하는 영지를 내렸다. 4월 27일, 이즈의 요리토모에게도 숙부
거병의 첫 공격 목표는 이즈의 모쿠다이(目代)<ref>지방관인 고쿠시의 대리인.</ref> 야마키 가네타카였다. 그 해 8월 17일, 호조 도키마사 등은 요리토모의 명으로 니라(韮) 산에 있던 가네타카의 모쿠다이 저택을 습격해 그를 죽였다. 이즈를 장악한 요리토모는 [[사가미 국]]의 도이노사토(土肥鄕)로 향했다. 따른 것은
==== 간토 평정 ====
[[파일:Tsurugaoka-hachimangu Shrine main shrine.jpg|
8월 29일, 요리토모는 아와에 상륙했다. 보소(房總)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上總介廣常, 가즈사노 히로쓰네)와 치바 쓰네타네에게 자신을 찾아올 것을 명했다.<ref group="주석">《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이때 장인인 호조 도키마사를 가이 국에 보내어,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에게 가세를 요청하도록 했다고 있지만, 엔케이본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도키마사는 이시바시 산에서 패한 직후 직접 가이 국으로 향하고 있다.</ref> 가즈사 · 치바 두 집안의 지지를 얻은 요리토모는 보소 반도에서 북상해 올라가(《아즈마카가미》·《겐페이성쇠기》)<ref group="주석">덧붙여 《아즈마카가미》에 의하면 요리토모가 아와에 상륙한 뒤, 처음에는 아와 국 사람인 안자이 가게요시(安西景益)의 환대를 받고 보소 반도에서 북상할 때, 아와 국 사람인 나가사 쓰네토모(長狹常伴)의 습격을 받았으나 이때 합류한 미우라 요시즈미의 도움으로 쓰네토모를 격퇴했다. 그 뒤 치바 쓰네타네가 요리토모에 가세하고, 쓰네타네의 적손 나리타카(成胤)가 9월 13일에 친헤이시파였던 시모우사 국 모쿠다이를 멸했으며 다음날(14일) 이전부터 치바 집안과 적대 관계였던, 친헤이케 친척이자 센다(千田)의 호간다이(判官代) 후지와라노 지카마사(藤原親政)를 생포했다. 17일에는 쓰네타네의 참가도 기다리지 않고 3백여 기로 시모우사의 고쿠후에 들어갔으며 이때 쓰네타네가 보낸 미나모토노 요리타카(源賴隆)가 가세했다(요리타카는 헤이지의 난 때 전사한 미나모토노 요시타카의 아들로, 요리토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겪은 그를 쓰네타네의 윗자리에 앉게 했다고 한다. 19일에 당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가즈사노 히로쓰네가 2만 기를 거느리고 참가해 왔는데, 요리토모는 기뻐하기는커녕 거꾸로 히로쓰네가 늦게 참가한 것을 몹시 비난했고 이에 히로쓰네는 두려움을 느껴 요리토모에게 공손하게 대했다고 한다(덧붙여 이때 히로쓰네의 행동에 대해서는 현재 의문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요리토모의 보소 북상에 대해서는 《아즈마카가미》 외에 엔케이본 《헤이케 이야기》나 《겐페이투쟁록》, 《겐페이성쇠기》 등의 문학작품에서 세부 사정에 대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ref>, 10월 초에 무사시 국(武藏國)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淸重)·아다치 도모토(足立遠元)가 가세해 왔으며, 한때 적대했던
가마쿠라에 무혈입성한 요리토모는
10월 16일,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받은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 기요모리의 손자)의 수만 기가 [[스루가 국]]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가마쿠라를 출발, 얼마 뒤
돌아오던 길에 사가미의 고쿠후(國府)에서 무장들의 훈공에 대한 첫 포상을 행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오바 가게치카를 처형한 뒤 사타케 히데요시(佐竹秀義)를 토벌하기 위해 다시 가마쿠라를 출발, 11월 4일에 히타치의 고쿠후까지 이른다. 가즈사노 히로쓰네의 활약으로 싸움은 요리토모의 승리로 끝났고, 히데요시는 도망쳤다(긴사金砂 성 싸움). 요리토모는 히데요시가 갖고 있던 영지를 휘하 무장들에게 훈공에 대한 포상으로 나누어주고 가마쿠라에 돌아와, 와다 요시모리를 사무라이도코로벳토(侍所別當)에 임명했다. 사무라이도코로는 훗날 가마쿠라 바쿠후의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 반 헤이시 원정 ====
지쇼 4년([[1180년]]) 말까지 [[규슈]] [[지쿠시]](筑紫) 지방과 [[시코쿠]] [[이요 국|이요]](伊予)의 고노 씨(河野氏), 오미 겐지(近江源氏) · 가이 겐지(다케다씨) · 시나노 겐지(信濃源氏) 등이 헤이시 타도를 외치며 거병했다. 전국적으로 반(反)헤이케 활동이 활발해지는 한편으로 헤이케도 후쿠하라(福原, 지금의 [[고베]])로 옮겼던 수도를 다시 교토로 옮겨 반격에 나섰고, 오미 겐지나 난토(南都, 나라) 등지의 [[기나이]] 지샤 세력을 진압한다. 그러나 [[요와]](養和) 원년([[1181년]])에 접어들어 [[히고 국|히고]](肥後)의 기쿠치 다카나오(菊池高直), [[오와리 국|오와리]](尾張)에 있던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미노 국|미노]](美濃)의 겐지(미노 겐지美濃源氏)들도 헤이케 타도의 군사를 일으키면서 반헤이케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만 갔다. 그 혼란의 와중에, 헤이케의 도료였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윤2월 4일 열병으로 숨을 거둔다. 전국적인 반헤이케 반란이 거듭되는 동안 헤이케는 미노 겐지를 무력 진압하고, 기요모리의 다섯째 아들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는 오와리 동쪽의 도고쿠 지역 정벌에 나섰다. 여기서 시게히라는 유키이에 등을 [[이세 국|이세]](伊勢)와 오와리의 경계였던 스노마타(墨俣) 강에서 격파하고 오와리를 제압했다. 요리토모는 와다 요시모리를 [[도토미 국|도토미]](遠江)로 파견했으나, 헤이케는 그 이상 동쪽으로 진군하지 않고 교토로 돌아왔다.
7월 무렵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모반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예전대로 미나모토와 다이라를 모두 불러들여 섬기게 하소서."라는 서신을 보내지만, 기요모리의 뒤를 이어 헤이시의 도료가 된 무네모리(宗盛)는 기요모리의 유언을 이유로 들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는 한편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무쓰노카미(陸奧守)에 임명하여 그가 요리토모 추토에 협력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 무렵 헤이시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요리토모가 아니라 요우와 원년([[1181년]]) 6월의 요코타(横田) 강변의 싸움 이후 활발해진 [[와카사 국|와카사]](若狹) · [[에치젠 국|에치젠]](越前) 등지의 호쿠리쿠(北陸) 반란 세력으로 옮겨갔고, 도토미에는 여전히 독립적 입장을 취하는 가이 겐지의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가 있어, 요리토모가 헤이시 세력과 직접 대치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에서 세력을 굳건히 한 채 중립을 고수하며 움직이지 않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동향 변화를 의식한 요리토모에게는 반도에서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이듬해인 [[주에이]](壽永) 원년([[1182년]])은 이상기후에 의한 대기근 등으로 헤이케가 그들의 적을 추토하는 일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 해에 요리토모는 [[이세 신궁]]에 헤이케 타도의 발원문을 바치고,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조복을 기원하며 에노시마(江ノ島)에 [[사라스바티|변재천]]을 권청한다.
주에이 2년([[1183년]]) 2월, 히타치에 있던 숙부 미나모토노 요시히로(源義廣)가 아시카가 다다쓰나(足利忠綱) 등과 함께 동 21일에 가마쿠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군사를 움직였다. 그 무렵 주요 고케닌들은 헤이시의 내습에 대비해 쓰루가에 있었으므로, 대응에 고심한 요리토모는 그 대응을 오야마 도모마사(小山朝政) 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동서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가라앉기를 기원했다. 도모마사 등은 노기미야(野木宮)의 싸움에서 요시히로 등을 격파하고, 패주하던 요시히로의 군사들은 요리토모의 이복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賴) 등에게 토벌되었다. 요리토모는 요시히로와 그에 가담한 무사들의 영지를 몰수해 자신들의 고케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로써 간토에서 요리토모에 맞설 세력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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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토모의 상경을 염려하던 요시나카는 앞서 윤10월 15일, 헤이시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교토로 돌아와 요리토모 추토의 명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11월에 요리토모의 명으로 교토에 파견된 요시쓰네의 군사들이 오미에 이르면서 헤이케와 요시쓰네 사이에 처하게 된다. 요시나카는 법황의 거처를 들이쳐서 고시라카와 법황을 가두고, 법황을 협박해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받아냈으며 주에이 3년([[1184년]]) 1월에는 세이토다이쇼군(征東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0일에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와 요시쓰네 형제가 수만 기를 이끌고 전진해 올라왔고, 결국 요시나카는 오미의 아와즈(粟津)에서 토벌당해 죽었다.
요시나카가 죽은 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있던 그의 적자 요시타카를 살해하고자 했다. 이를 오히메로부터 전해들은 요시타카는 4월 21일에 여장하고서 가마쿠라를 도망쳤다. 격노한 요리토모는 측근 호리 지카이에(堀親家)에게 명하여 그를 잡도록 했고, 24일에 무사시 국 이루마(入間) 강변에서
==== 헤이케 추토 ====
요시나카를 토벌한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는 헤이케 추토를 위해 교토를 떠났고, [[겐랴쿠 (12세기)|겐랴쿠]] 원년([[1184년]]) 2월 7일, [[셋쓰 국]] 이치노타니(一ノ谷) 싸움에서 헤이케에 대승을 거두어, 다이라노 시게히라를 잡아 교토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싸움 뒤에 요리토모는 요시쓰네를 자신의 대관으로 교토에 남겨두고, 요시쓰네를 통한 기나이 무사들의 장악에 몰두했다. 한편으로 시코쿠로 피한 헤이케를 바짝 몰아붙이고자 규슈 · 시코쿠의 무사들에게 헤이케 추토를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 도이 사네히라 · 가지와라노 가게토키를 [[산요도|산요]](山陽) 여러 쿠니에 파견한다.
6월 5일, 다이라노 요리모리(平賴盛)<ref group="주석">한때 요리토모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 이케노젠니의 아들이다.</ref> 와 가마쿠라로 돌아온 노리요리, 미나모토노 미쓰쓰나(源光綱), 미나모토노 요시노부(源義信)가 고쿠시로 임명되고 요리토모 자신은 지행국주가 되었다. 한편 가이 겐지의 이치조 다다요리(一條忠賴)가 가마쿠라에서 아마노 도카게에게 주살당하고 있다. 또한 조정으로부터 매형(또는 매제) 이치조 요시야스(一條能保)<ref>요시야스의 아내 보몬히메(坊門姬)는 요리토모와는 동복남매 사이다.</ref> 등의 관위를 얻었다. 8월 8일, 노리요리를 대장으로 하는 헤이케 추토군이 가마쿠라에서 출진한다. 함께 간 게닌은 [[호조 요시토키]] ·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 · 지바 쓰네타네 · 미우라 요시즈미 · 고야마 도모미쓰(小山朝光) ·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 · 와다 요시모리 · 아마노 도카게 등이었다. 요리토모는 노리요리에게 교토에 주둔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27일에 교토에 들어간 추토군은 29일에 헤이시추토사(平氏追討使)의 관부를 받아 9월 1일 서해로 향했다.
10월 6일, 구몬쇼(公文所)를 열어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廣元)를 벳토로 삼았다. 구몬쇼는 훗날 만도코로(政所)로 이름을 고쳐, 가마쿠라의 정무와 재정을 맡게 된다. 20일에는 소송을 담당하는 몬주쇼(問注所)를 열고 미요시 야스노부를 집사로 삼았다. 이 시기 니카이도 유키마사(二階堂行政), 다이라노 모리토키(平盛時) 등 중 · 하급의 유능한 관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할 곳을 찾아 가마쿠라로 내려와, 막부의 초기 관료 조직을 형성하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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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요리토모는 교토에 사자를 보내고, 기세 강을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11월 상순에 요시쓰네·유키이에가 없는 교토에 들어온 토고쿠 무사들의 태도는 강경했다. 법황의 지쿄고쿠인 [[하리마 국]]으로 가서 법황의 현지 대관을 내쫓고 창고들을 봉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리토모와 도고쿠 무사들의 분노 앞에 낭패한 조정은 결국 11일,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선지를 여러 구니에 내린다. 다음 날인 12일에 오에노 히로모토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처치에 골몰하는 요리토모에게 전국에 슈고 · 지토를 설치할 것을 진언하고, 이에 찬동한 요리토모는 이리저리 당황해하던 조정에 강경한 태도를 비치며 정치적인 공세를 펼쳐나갔다.
24일에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1천 기의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들어온 것은 호조 도키마사였다. 요리토모의 분노를 법황에게 고하며 가마쿠라측의 요구를 제출하여 법황과의 교섭에 들어갔고, 나흘 뒤인 28일에 도키마사는 인(院)<ref>법황의 처소.</ref> 의 근신인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를 통해 요시쓰네 추포를 목적으로 하는 '슈고 · 지토의 전국 설치'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가마쿠라의 권력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단초를 마련했다. 12월에는 '천하의 초창'을 강조하며, 인 내부의 반(反)가마쿠라파 근신들의 해관과 의주공경(議奏公卿)에 의한 조정 운영, 가네자네를 나이란(內覽)<ref>나이란에게는 천황에게 바쳐지는, 혹은 천황의 재가를 받은 모든 공문서들을 가장 먼저 열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ref> 으로 삼는다는 3개 조항의 묘당개혁 요구를 들이댔다.<ref group="주석">《아즈마카가미》동년 12월 6일조, 《교쿠요(玉葉)》동년 12월 27일조. 다만 의주공경이라고 친가마쿠라파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이때 해임된 근신들도 나중에 법황의 요청으로 다시 복권되었기에 요리토모의 의도가 모두 관철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가네자네를 나이란으로 삼음으로서 인의 자의적인 행동을 억제하는 효과는 있었다.</ref>.
분지 2년([[1186년]]) 3월,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내린 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황의 총신이었던 [[셋쇼]] 후지와라노 모토미치(藤原基通)가 사임되고, 가네자네가 대신 셋쇼가 되었다. 4월 무렵부터 요시쓰네가 교토 주변에 출몰한다는 풍문이 나돌자, 요리토모는 이 배후에 반가마쿠라파인 인과 여러 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면서도, [[도호쿠 지방|도호쿠]]에도 눈길을 돌려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향해 "히데히라는 오쿠(奧) 6군의 주(主), 나는 도카이도의 총관이니 수어지교(水魚之交)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수도에 보내는 말이나 금은 가마쿠라에서 받아 전송하고자 한다."는 서신을 보내 히데히라의 속을 떠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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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쓰네의 목은 6월 13일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와다 요시모리와 가지와라노 가게토키가 그 목을 조사하고, 요시쓰네의 목이 분명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5일에는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조정에 요구하며 고케닌들을 가마쿠라에 모으지만, 칙허는 내려지지 않았다. 요리토모는 오바 가게요시를 불러 "여태 칙허가 없다. 서둘러 고케닌을 불러 모아야 하는데 이를 어찌할까?"라고 묻자, 가게요시는 "군중에서는 장군의 영만 따를 뿐 천자의 조는 듣지 않는 법입니다."라 대답했다. 요리토모는 몹시 기뻐하며 가게요시에게 포상하였다.
그렇게 칙허도 기다리지 않고 7월 19일, 요리토모는 1천여 기를 인솔하고 가마쿠라를 출발해 야스히라 추토에 나섰다. 25일에는 [[우쓰노미야 시|우쓰노미야]]에 도착해 우쓰노미야 대명신(宇都宮大明神)<ref>《고사기》 및 《일본서기》에서 [[스진 천황]](崇神天皇)의 제1황자였다 전하는 도요키이리비코노 미코토(豊城入彦命). 아우 [[스이닌 천황]](垂仁天皇)이 뒤를 이어 천황이 된 뒤, 도고쿠를 다스리기 위해 동쪽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사후에 신으로 모셔진 그의 전설은 왕족에 의한 국가평정 설화의 일부이며, 초기 야마토 왕권의 지배력이 지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시사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ref> 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한편, 앞서 요리토모에게 패해 도망쳤던 사타케 히데요시 등이 군에 가세했다.
8월 7일부터 10일에 걸쳐 아쓰카치 산(阿津賀志山)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후지와라노 구니히라를 죽이고 요리토모는 더욱 전진하여 야스히라를 쫓아 북상한다. 22일에 오슈 후지와라씨의 본거지인 히라이즈미(平泉)의 야스히라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야스히라는 이미 저택을 불사르고 도망친 뒤였다. 요리토모는 조정에 전황을 알리는 사자를 보낸 뒤 야스히라의 수색을 실시했다. 26일,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에게 서신을 보내 목숨을 구걸하며 답신은 히나이 군(比内郡)에서 듣겠노라는 말을 했다. 서신을 받은 요리토모는 히나이 군에 야스히라 수색을 명하고 9월 2일에는 이와이 군(岩井郡) 구리야가와(厨河)로 진을 옮겼다.<ref group="주석">지금의 [[
구리야가와로 돌아온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가 건립한 주손사(中尊寺) · 모쓰사(毛越寺), 우지(宇治)의 [[뵤도인]]을 본떠 지은 무량광원(無量光院) 등의 사원을 보호하도록 명했다. 히라이즈미에 돌아온 뒤에는 여러 절을 참배하고 감명을 받아, 가마쿠라로 돌아온 뒤 주손사 경내의 오초슈인(大長壽院)을 본뜬 영복사(永福寺)를 짓기도 했다. 24일에는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淸重)에게 히라이즈미의 치안 유지를 명함과 동시에, 다테 군(伊達郡) · 이와이 군(磐井郡) · 오시카 군(牡鹿郡) 등을 영지로 주었다. 27일, 아베노 요리토키(安倍賴時)가 살았던 고로모 강의 옛 터를 방문하고 28일에 히라이즈미를 출발해, 10월 24일에 가마쿠라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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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 5년([[1189년]]) 11월 3일, 조정으로부터 오슈 정벌을 명하는 서장이 도달되고, 요리토모를 아제치(按察使)로 임관한다는 것이 타진되었으며 훈공이 있는 고케닌들을 더 추천해 올리라는 조정의 통보를 요리토모는 모두 사양했다. [[겐큐 (12세기)|겐큐]] 원년([[1190년]]) 10월 3일에 요리토모는 마침내 상경을 결정하고 가마쿠라를 출발해, 헤이지의 난 때 아버지가 숨을 거둔 오와리나 아버지와 형이 머물렀던 연고지인 미노를 거쳐 11월 7일에 1천여 기의 고케닌을 거느리고 교토로 들어왔다. 그리고 예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살았던 로쿠하라(六波羅)의 옛 터에 지은 새 저택으로 들어갔다.
[[파일:Minamoto no Yoritomo kaou.jpg|200px|
9일에 고시라카와 법황을 배알한 요리토모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법황과 독대했다. 이 독대로 일찍이 요시쓰네와 유키이에의 수색·체포의 목적으로 설치·유지되고 있던 일본국총추포사(日本國總追補使)·소지토(總地頭)의 지위를,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치안경찰권 행사를 위해 영구적인 것으로 바꾸게 한 겐큐신제(建久新制)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요리토모가 바랐던 '도고쿠의 지배자'의 상징으로서의 지위인 정이대장군으로는 임관되지 못하고 대신 문관의 직제인 [[대납언]]으로 임관되었다. 요리토모는 이것을 사양하고, 고토바 천황에 대한 배알까지 모두 마친 뒤 로쿠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로쿠하라에 "지금 이에 대해 이의를 두지 말라"며 권대납언(權大納言) 임관을 명하는 상황의 선지가 내려졌다. 다시 거듭 사퇴를 청하는 글을 보냈지만 이는 수리되지 않았다. 게다가 22일에는 무관의 최고직인 근위대장(近衛大將) 임관까지 타진되었다. 이번에도 요리토모는 사양했지만 마침내 24일에 그에게 우콘에노다이쇼의 직책이 내려졌다. 12월 3일, 요리토모는 두 관직을 모두 사임하고 대신 11일에 훈공이 있던 고케닌을 그 자리에 대신 임관시킨다.<ref>요리토모가 권대납언·근위대장을 필사적으로 사임한 것은 이들 관직 모두 교토 조정의 공사 운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조정의 공적인 일에 참가할 의무가 있었던 이들 관직을 사임하지 않고는 가마쿠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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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가네자네의 방해를 받을 것을 걱정한 요리토모는 가네자네의 정적이었던 쓰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나 단고노 쓰보네(丹後局)<ref>고시라카와 법황의 후궁.</ref> 와 접촉, 대량의 선물이나 막대한 장원의 안도 등을 통해 오히메의 입궁을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ref>결국 겐큐 7년([[1196년]]) 11월, 가네자네는 미치치카의 모략을 받고 일족과 함께 실각했으며, 요리토모는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겐큐 7년의 정변'이라 부르며, 이는 반(反)막부파의 대두를 초래해 [[조큐의 난]]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ref> 그러나 겐큐 8년([[1197년]]) 7월에 오히메가 요절하면서 입궁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겐큐 9년([[1198년]]) 정월, 고토바 천황은 황태자 [[쓰치미카도 천황|다메히토 친왕]](爲仁親王)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황태자의 생모는 미치치카의 양녀였는데, 미치치카는 이를 계기로 천황의 외척으로서 권세가 높아졌다. 요리토모의 반대는 무시되었다. 요리토모는 나아가 차녀 산반히메(三幡姬)의 입궁을 기획하고 뇨고(女御)의 선지를 받아냈지만, 겐큐 9년([[1198년]]) 12월 27일, 사가미(相模) 강에서 열린 다리 낙성식을 겸한 공양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크게 부상을 입는다. 원인은 낙마라고 말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겐큐 10년([[1199년]]) 1월 11일에 출가하여 13일에 서거하였다. 향년 53세였다.(만 51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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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처음으로 고안한 무사정권은 점차 제도화되어 나중에는 조정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1865년까지 '[[막부]](幕府)' 시스템은 무려 68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 막부 정권의 창시자로서 요리토모의 실적은 일본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의무교육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라는 통치자의 이름을 배우고 있다.
반면 인격에 있어서는 '냉혹한 정치가'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생전에 요시쓰네를 비롯한 많은 동족과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막부의 정이대장군이면서 직접 군사를 인솔한 적은 드물었고<ref>요리토모 자신의 무예는 뛰어났지만 전투 지휘관으로서는 각별한 실적을 드러내지 못했다.</ref>, 주로 정치적 교섭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수립을 완수했다. 오늘날까지 일본 사람들에게 '비극의 영웅'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막내동생 요시쓰네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의 인기는 그 실적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높지 않을 뿐 아니라 소설이나 만화에서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일도 적다.<ref>가마쿠라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작가 나가이 미치코(永井路子)는, 요리토모를 '새롭게 일어서던 토고쿠 무가 세력의 상징'로 평가하면서도 그 실적을 요리토모 한 개인에게 몰아주는 식의 과대평가를 경고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가진 정치적 능력이나 인재 장악 능력은 높게 평가하며, 일본 역사에 있어 조직 만들기의 천재로서 그의 손재주는 후세에 그를 표본으로 삼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도 훨씬 정교하다고 호평하고 있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세계』중에서).</ref> 이상은 대체로 오늘날에 있어서의 요리토모에 대한 평가이며, 과거로부터 이미 요리토모는 많은 인물들에게 평가받아왔다.
;호조 마사코와 휘하 고케닌들
:요리토모 사후에 일어난 [[조큐의 난]]으로 조정과 막부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 호조 마사코는 자신의 앞에 모인 고케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우대장군(右大將軍, 요리토모)께서 역적을 멸하고 간토를 여신 이래로 관위며 녹봉, 그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은혜를 알고 이름을 아끼는 자라면 어서 불충의 참신을 토벌하여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들은 고케닌들은 눈물을 흘리며 보은을 맹세했다. 요리토모의 바쿠후 내에서의 위치나 고케닌들로부터의 높은 평가를 알 수 있다.
;《보력간기(保曆間記)》<ref>[[
:요리토모 죽음의 원인을 그가 죽인 미나모토노 요시히로나 요시쓰네, 유키이에 및 안토쿠 천황의 망령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미 그 당시부터 그의 생애는 '많은 죄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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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무사의 감각이라면 몰라도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사의 감각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유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기요모리는 거꾸로 요리토모와의 화목과 고시라카와 법황과의 협조 정치를 바랐다고도 한다. 하지만 기요모리 사후 그의 뒤를 이은 무네모리가 어리석었던 탓에 사사건건 반대했고 결국 무엇 하나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이다.
다만 오늘날까지 기요모리의 묘소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교쿠요》지쇼 5년([[1181년]]) 8월 1일에 《헤이케 이야기》의 그것과 제법 닮은 뜻의 기요모리의 유언<ref>"내 아들과 손자, 한 명도 빠짐없이 그 시신은 요리토모 앞에서 보여야 할 것이다."라는 유언이 《교쿠요》에 등장하고 있다. 요리토모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죽어야지 편안하게 집안에 누워서 죽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보인다.</ref> 과 함께, 그런 이유로 헤이케가 요리토모를 받아줄 리가 없다고 저자 가네자네는 적고 있다.
=== 요시쓰네와의 대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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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원인 ===
각 사료에서는, 사가미 강의 다리 공양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길에 병을 얻게 된 것까지는 일치하고 있지만,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즈마카가미》는 '낙마', 《이노쿠마 간파쿠기(猪隈關白記)》는 '음수병(飮水病)', 《조큐기(承久記)》<ref>조큐의 난에 대한 기록.</ref> 는 '수신(水神)에게 홀려', 《보력간기》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나 안토쿠 천황 등의 망령을 보고 정신을 잃고 병으로 쓰러졌다'고 적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요리토모가 사망한 원인은 오늘날까지 많은 설이 존재하며, 확정된 것은 없다. 다만 사망 시점에 대해서만은 여러 기록이 모두 일치하고 있어 의문을 품는 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낙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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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사당 ==
요리토모의 묘는 [[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경내에도 동명의 신사가 있는데, 신사의 전승에 따르면 요리토모의 부인 마사코가 조정으로부터 백기대명신의 신호를 받아 죠지 2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지었다고도 한다. 메이지 21년([[1888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으며 메이지 이후로는 닛코 토쇼구(日光東照宮)의 상전(相殿)으로도 모셔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매년 4월 13일, 요리토모의 기일로 알려진 날에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의 신직(神職) 주재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공 묘전제'가 행해지고 있다. 이 날에는 [[가고시마]]의 시마즈 집안의 대표도 참례한다. 또한 닛코 토쇼구에서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천인무사행렬에서는 요리토모의 신여(神輿)를 멘 행렬이 참배길을 왕복하며, [[효고현]] [[
== 각주 ==
=== 내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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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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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
|후임자
|직책
|대수
|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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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번째 줄:
{{전거 통제}}
[[분류:
[[분류:1199년 죽음]]
[[분류:가와치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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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즈오카현의 역사]]
[[분류:가나가와현의 역사]]
[[분류:
[[분류:아이치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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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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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본의 인물신 (겐지)]]
[[분류:사고사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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