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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 통일 =====
[[파일: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oryo_Taejo_Wangkun_2Goryo Taejo Wangkun 2.jpg|섬네일|오른쪽|180px|헌릉에 있는 태조 왕건 영정]]
 
이후 [[신라]]를 침략하는 [[후백제]]와 교전하며 [[신라]]를 지원하였다. 933년 5월엔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의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근처까지 진군해 신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당시 의성부(경북 의성)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고, 유금필은 당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 중 급히 추려 출정한 결사대 80명의 병력과 사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위치한 여울.)을 건너 신검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ref>고려사, 유금필 열전,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사대의 지휘관인 유금필은 두렵지 않고 그의 부하 병력들만 매우 두려워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고, 실제로는 당연히 유금필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부하 병력들보다 유금필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ref> 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해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고, 이후 유금필과 그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에 사탄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신검의 후백제군이 자도에서 유금필과 그가 거느린 80명의 결사대를 공격했지만 금달, 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고 그 외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사로잡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다시 당했고, 자도에서의 유금필군의 전설적인 승전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유금필에게 매우 크게 감탄했다고 고려사 유금필 열전,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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