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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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erengariaofNavarre.jpg|200px|thumb|베렝가리아]]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llang|eu|Berengela Nafarroakoa}}, [[1165년]]경 또는 [[1170년]]경 - [[1230년]] [[12월 23일]])는 [[나바라 (나라바)왕국|나바라의나바라]]의 산초[[안초 6세]]와 [[산차 (카스티야)|카스티야의 산차]] 사이에 태어난 장녀이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의 왕비이다.
 
== 생애 ==
나바라의 왕녀 베렝가리아의베렝겔라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1191년]] [[5월 12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결혼했고 후사는 태어나지 않았다. 후사가 없었던 이유로는 리처드 1세가 동성애자였다는 설과 베렝가리아가베렝겔라가 불임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슬하에 코냑의 필립이란 사생아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리처드가 동성애자였다는 설의 근거로는 부합하지 않다는 논박이 있다.
 
베렝가리아는베렝겔라는 결혼을 위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했으나, 리처드 1세가 즉위하자마자 즉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 바람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베렝가리아는베렝겔라는 리처드 1세의 누이이자 서거한 시칠리아 선왕의 왕비였던 [[시칠리아의 조안|조안]]과 십자군 원정에 합류했다. 성지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베렝가리아와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가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 태수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에게 납치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1191년]] [[5월 12일]] 베렝가리아와베렝겔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에 유폐당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베렝가리아와베렝겔라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아내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을 명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매주 한번씩 베렝가리아와베렝겔라와 함께 교회에 갔으나 유지된 기간은 알 수 없다.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199년]] 리처드 1세가 서거하자 베렝가리아는베렝겔라는 진정으로 비탄에 빠졌다.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존|존]]은 베렝가리아에게베렝겔라에게 선왕의 미망인으로서 받아야 할 연금을 주려 하지 않았고, 이후 [[헨리 3세]] 대에 되어서야 연금을 지불하였다.
 
베렝가리아는베렝겔라는 자신의 영지 프랑스 [[르망 (프랑스)|르망]]에서 평탄한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L'Epau 수녀원의 후원자가 되었고, 말년에는 그 수녀원에 들어가 [[1230년]] [[12월 23일]] 생을 마쳤다들어가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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