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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기 (1788~1804) ==
네케르의 후임인 칼론과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이브리엔이 프랑스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8월 16일, 국고가 바닥나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다. 8월 25일, 약탈과 폭동이 빈발하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네케르를 다시 재무총감에 임명하였다.<ref>[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acques-Necker <nowiki>[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자크 네케르 (Jacques Necker)</nowiki>]</ref><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41</ref> 네케르는 공채발행을 통해 급한 위기를 수습하였고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88년에 명사회를 소집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12월 12일 해산시켰다.<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44</ref> 1789년초가 되자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었다.<ref>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p270</ref><ref>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p246</ref> 선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여러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ref>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p271</ref> [[제3신분]](평민)은 평민대표의 인원은 2배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고, 이 요구는 관철되었다.<ref>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247</ref>
 
1789년 5월 5일, 175년만에 삼부회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개최했는데개최되었는데<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55</ref><ref>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251</ref>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ref>박남일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서해문집 2006.10.10, p168</ref> 삼부회는 초반부터 머릿수 표결과 신분별 표결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되었다. 신분별 표결방식은 각 신분별 의결후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는데,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기득권 수호를 위해 협력하므로 대부분 2대 1이 되어 제3신분인 평민이 불리했다. 네케르는 합동 심의를 한후 신분별 투표대신심의와 머릿수 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54</ref> 최종적으로 중재에 실패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네케르가 개혁안을 조직화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는 네케르가 중재안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삼부회에서 일어난 투쟁 과정에서 이것이 뒷전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가며 파행이 장기화되던 끝에 제3신분인 평민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6%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252</ref>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 />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 /><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5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