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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조선 정조|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 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ref>정약용의 외조부 윤덕렬의 친손자가 윤지충이니,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윤지충은 바로 정약용으로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ref>과 [[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써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 [[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셋째 형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ref>초기 조선교회의 [[양반]] 신자들은 [[교황청]]에서 백여 년의 [[신학]] 논쟁 끝에 조상 제사를 [[교리]]를 이유로 금지함으로써 유교전통을 부정하자 대부분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ref>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포항시|장기]], [[전라도]] [[강진군|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