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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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사군'''(漢四郡, 기원전 108년 ~ 314년) 또는 '''한군현'''(漢郡縣)은 [[기원전 108년]] 중국에서[[전한]] 투항한[[전한 위만의무제|무제]]가 반란과[[고조선|위만조선]]을 한무제의멸망시킨 침입으로 고조선의 영토였던 요동을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중국사서에 기록된설치한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의 4군과 그 속현을 말한다. 근대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사군(四郡)이라 불렀고, 현대 한국사학계에서는 한군현, 동방변군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한사군의 위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의 학계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 식민사관의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중국의 한무제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했다고 곡해하였다.
 
한사군 한반도 경영 이론은 중국과 일본 일부 남한 사학계에 의하여 지지되었다.
 
중국의 1차사료는 모두 한사군의 위치는 요동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사군 이론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조선에 있던 낙랑국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으로 곡해하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 주석
 
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後漢書 光武帝本記 註釋),
 
고조선의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
 
 
 
사기 하본기 태강지리지
 
太康地理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후한서後漢書》 〈배인열전裵駰列傳〉
 
《후한서》 〈배인 열전〉에 "배인은 과거 급제자이므로 장잠현의 현령으로 삼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주석(註釋)에 "장잠현은 낙랑군 소속인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出爲長岑長〔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라고 말하고 있다.
 
 
 
《사기색은 史記索隱》
 
왕험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 역사 ==
=== 설치 및 변천 ===
[[파일:Hangunhyeon.PNG|오른쪽|섬네일|200px|[[기원전 106년]]]]
전한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의 3군을 위만조선 영내에 설치하였으며, [[기원전 107년]]에 다시 예맥(濊貊) 지방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으며 [[기원전 75년]](전한 소제 원봉 6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지금의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노성(老城) 지방)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신나라]]의 [[왕망]]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太尹)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 찍힌 봉니(捧泥)가 발굴되었다.<ref>1933년 낙랑치지 토성리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f>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사람 [[왕조 (후한)|왕조]](王調)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 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한편 현도군은 후한 초기에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다시 무순(撫順) 지방으로 이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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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에서 사군이 폐지되고 이부(二府)로 재편된 것으로 잘못 표기한 이래 《동국통감》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조선 초기까지는 사군-이부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이부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게 되어 사군의 사실만 받아들여졌다.
*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율성론’, ‘반도사관’ 등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한사군이 사용되었다. 한사군을 중국의 식민지로 받아들이는 한편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모두 식민지 정권으로 규정하고 사대주의에 대해서도 타율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한민족의 역사가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론을 펼쳤다.
* 초기의 [[고구려]]는 한사군과 밀접한 지역에 위치하여 한사군과의 투쟁 속에 성장하였으며, [[예 (민족)|예]](濊)나 [[맥족|맥]](貊), 그리고 [[삼한]]도 한사군에 대항하였고, 한사군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국가의 성립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였다.
 
=== 최근의 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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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에 대한 논란 ==
[[파일:Nagrangun2.jpg|오른쪽|섬네일|200px|낙랑군 위치에 관한 학설]]
{{참고|낙랑군}}
{{참고}}[[박지원 (실학자)|박지원]] 등의 [[실학자]],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들은 낙랑이 요동 일대에 존재했다고 밝혔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의 일부 학자들은 낙랑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ref>송호정, 〈남북역사학의 쟁점 고대사의 강역, 어디까지 우리 땅이었나〉, 《역사비평》13호, 1990 / 박선희 교수, 〈[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193609&section=sc1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ref>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했다.<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ref>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과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임둔군이나 진번군의 경우 설치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철폐되었고, 현도군 역시 [[랴오닝성]] 무순 방면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위치에 대한 논란은 주로 낙랑군을 두고 계속되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였다. [[박지원 (실학자)|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낙랑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ref>[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1092862&year=2009 한국목간학회 판독회 보도]{{깨진 링크|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1092862&year=2009 }}</ref>
 
{{참고}}그러나 [[박지원 (실학자)|박지원신채호]] 등의 [[실학자]],일부 [[신채호]]민족사학자 등의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민족사학자들은않고 낙랑이 요동 일대에 존재했다고존재하였다고 밝혔다주장하고 있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의 일부 학자들은 낙랑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ref>송호정, 〈남북역사학의 쟁점 고대사의 강역, 어디까지 우리 땅이었나〉, 《역사비평》13호, 1990 / 박선희 교수, 〈[http://n.breaknews.com/sub_read.html?uid=193609&section=sc1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ref>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했다주장하기도 한다.<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ref>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ref>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ref>
낙랑의 대동강 유역설은 고조선에 있던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곡해하여 마치 중국의 한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낙랑이라는 지명은 한반도 전역에서 나타난다.
 
한사군 이론의 객관적인 증거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태수의 인장은 모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 문헌에 서술된 한사군 ==
=== 《사기》 ===
《[[사기 (역사서)|사기]]》〈조선열전〉에 고조선의 멸망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사군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군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사군은 사실이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ref>[[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인물과 사상사, 2004년.</ref> 그러나 《사기》〈남월열전〉,〈서남이열전〉 등에도 설치된 군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 《한서》 ===
《[[한서]]》〈조선전〉에 《사기》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한사군의 명칭이 명시된 점이 조금 다르다. 한편, 〈지리지〉에는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낙랑군은 원봉3년(BC108), 현도군은 원봉4년(BC107)으로 설치된 연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 《무릉서》 ===
[[사마상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문서로, 임둔군, 진번군의 위치를 [[장안]]으로부터 각각 6138리, 764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상여는 무제가 조선을 평정하기 9년 전에 죽었기에 《무릉서》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 《후한서 광무제 본기 주석===
《[[후한서]]》〈군국지〉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설명이 나타난다. 간략한 건치연혁과 함께 [[낙양]]과의 거리를 각각 5000리, 4000리로 기록하고 있다.
 
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後漢書 光武帝本記 註釋),
 
고조선의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
 
 
사기 하본기 태강지리지
 
太康地理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萬里長城)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후한서後漢書》 〈배인열전裵駰列傳〉
 
《후한서》 〈배인 열전〉에 "배인은 과거 급제자이므로 장잠현의 현령으로 삼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주석(註釋)에 "장잠현은 낙랑군 소속인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出爲長岑長〔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라고 말하고 있다.
 
 
=== 《삼국지》 ===
《[[삼국지]]》〈동이전〉에 낙랑 및 대방군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요동의 군벌 공손강이 낙랑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을 분할하여 대방을 설치했으며, 경초(景初) 연간(237~239)에 사마의가 공손연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 《진서》 ===
《사기색은 史記索隱》에서 왕험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
《[[진서]]》〈지리지〉에 낙랑군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276년에 평주(平州)를 신설하고 낙랑군을 소속시켰다고 한다.
 
=== 《자치통감》 ===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자치통감]]》〈진기(晉紀)〉에 낙랑군 폐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313년에 낙랑, 대방 지역의 군벌 장통(張統)이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선비족의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모용외는 자신의 세력권인 요서·요동 지역에 낙랑군의 피난민을 받아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 이와 관련해서 요동이나 요서 일대에 낙랑군을 비정하는 주장에 대해 주류 사학계에서는 이 시기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군을 혼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ref>안정복, 《[[동사강목]]》, 1778.</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186631 上古史 논쟁, 양식과 룰을 지키자]</ref> 재야사학계에서는 이 내용이 교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ref>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