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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ref name=a>이행, 《용재집》 권10, 인천군 채 공 묘지</ref> 1470년(성종 11년)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음악에도 뛰어나 [[1475년]] [[조선 성종|성종]] 때 이조정랑으로서 장악원의 일까지 맡아보았다.<ref> 《성종실록》 권60, 성종 6년(1475년) 10월 26일(임인) 5번째 기사 </ref>
 
1477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ref>채수, 《나재집》 권1, 홍문관예문관합사상소(弘文館藝文館合司上疏)</ref>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 윤씨]](廢妃尹氏)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ref name=a/>
 
1485년 비로소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ref name=a/>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ref name=a/>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 지지(地誌)·, 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ref>《국조인물고》 권43, 연산시 이화인, 채수의 비명(남곤 지음)</ref>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f>『성종실록』,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그러나 성격이 경망되고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여 독실한 유학자는 못 된 데다가, 1511년(중종 6) 중종의 정통성을 비판한 <설공찬전 薛公贊傳>이라는 패관소설(괴담소설)을 지어 윤회화복을 말하다가 사림의 비난을 받아 책이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f>『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ref>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