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225 바이트 제거됨 ,  6개월 전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시각편집기 고급 모바일 편집
태그: m 모바일 웹 시각편집기 고급 모바일 편집
 
==== 유년기 (1880 ~ 1888) ====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의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ref name="기념사 1">[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1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ref><ref>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ref>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의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ref name="기념사 1">[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1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ref><ref>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ref>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동국통감|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ref name=":2">{{웹 인용|url=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26/2006092677050.html|제목=[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주간조선}}</ref>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학문 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ref name="일지1">백범일지 상권 참조</ref>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ref name="김구249">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ref>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ref name="김구249"/>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ref name="김구249">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ref>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ref name="김구249" />
 
==== 청소년기 (1888 ~ 1892) ====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ref name="기념사 1"/>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892년]]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거나 매관매직 하는 등의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ref>[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ref>[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 청년기 ===
==== [[동학 농민 혁명|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1895) ====
{{참고|천도교|동학 농민 운동}}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 (천도교)|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ref name="기념사 1"/>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ref name="기념사 1" />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ref name="일지1"/>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소총|총]]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ref name="김구249"/>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ref name="기념사 1"/>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安泰勳)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가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부|경성]]의 [[김홍집 (1842년)|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 (1844년)|김종한]]의 원조와 [[황해도|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ref>{{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 ====
[[파일:Go neung-seon 01.jpg|섬네일|160px|right|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자|공]][[맹자|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 (1842년)|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 치하포 사건과 투옥생활 ====
===== ''치하포 사건 (1896)'' =====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 금주(서옥생의 집)로 향하던 중 [[평안북도]] [[안주군|안주]]에서 [[단발령|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1896년 2월 하순(3월 8일) 용강군에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많은 빙산(큰 얼음덩어리)을 만나 갇혀 죽을 고비에서 여러 선객과 뱃사공을 독려하여 빙산을 헤쳐나감으로써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 치하포의 한 여점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여점에 있는 여러사람들 중에 단발에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은 정씨로 [[장연군|장연]]에 살고 있다고 하였으나 말투가 장연말이 아니고 서울말인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1896년]] 6월 말 해주부에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에 있는 인천감리서로 이감되었다.<ref name=":15">{{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233|제목=치하포사건(鵄河浦事件)|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 ''사형 모면, 옥중 계몽운동, 탈옥 (1896~1898)'' =====
인천 감리서(인천옥)로 이감된 후, 인천항경무서 경무관 김윤정(김순근)이 주재하는 신문이 있었다.  이때 치하포에서 일본인 살해사실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김구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왜구 1명을 타살한 사실이 있다고 답하였다. 이 신문에 참석한 일본경찰을 향하여는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이 몸으로 너희를 다 죽여서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호령하였다.  추가신문을 위하여 착석한 인천감리 이재정에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이에 이재정 등 관리들은 부끄러워하면서 김구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수사단계: 1896.8.31, 초초)
 

편집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