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박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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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문·고문 논쟁 ===
그런데 전한시대에 박사관에서 쓰여진쓰인 5경의 텍스트는 한대의 예서체로 개서(改書)된 금문(今文)경(經)이었다. 그러던 것이 무제의 말년경에는 전국 시대의 서체로 쓰여진 고문(古文)경(經)이 각지에서 출현되었다. 이 고문경은 종래의 금문경에 비교해 편수와 자구에 이동(異同)도 있었지만, 전한말의 [[왕망]]이 찬탈을 계획할 때에 고문경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그가 고문에만 있는 《주례(周禮)》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찬탈의 이론적 무기로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여 고문경을 받드는 학파가 박사관에 세워졌으나, 그의 정권이 전복된 후 후한 시대에도 5경에 대하여 금문(今文), 고문(古文) 양파가 박사관의 지위 획득을 둘러싸고 대립을 계속하였다. 전한에서는 금문파가 우세하였으나 후한에서는 고문파가 우세하였다고 한다.
 
== 백제의 오경박사 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