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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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임기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막말]]
|출생 = [[1794년1793년]] [[6월 22일]]
|출생지 = [[에도 성]]
|사망 = [[1853년]] [[7월 27일]] (59세)
|사망지 =
|개명 = 아명: 도시지로(敏次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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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사항 =
}}
'''도쿠가와 이에요시'''({{llang|ja|徳川家慶}}, [[1794년1793년]] [[음력 5월 14일]] - [[1853년]] [[음력 6월 22일]])는 [[일본]] [[에도 막부]]의 12대 [[쇼군]]이다.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둘째 아들이다.
 
== 생애 ==
[[1794년1793년]] [[6월 22일]]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차남으로 [[에도 성]]에서 태어났다. 맏형인 [[다케치요]]가 요절했기 때문에 장군의 세자가 되어 [[1837년]]([[덴포]] 8년)에 45세에 장군직을 물려받았지만, 이에나리가 중진으로 강력한 발언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1841년]], 이에나리의 사후 이에요시는 넷째 아들 이에사다를 장군 후계자로 정했다. 또한 노중 수좌로 [[미즈노 다다쿠니]]를 중용하고 이에나리파를 숙청하고 [[덴포의 개혁]]을 진행시켰다. 다다쿠니는 막부 재정 재건에 나서 여러 개혁을 진행하였고, 철저한 사치 단속과 긴축 재정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세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언론 통제도 행하며, [[다카노 조에이]]와 [[와타나베 가잔]] 등의 개혁파 학자를 탄압했다. (만사의 옥)
 
[[1843년]]([[덴포]] 14년) 막부가 [[에도]], [[오사카]] 주변의 [[다이묘]], [[하타모토]] 영지를 막부 직할 영지로 편입하려고 상부의 지령을 발령하자 맹렬한 반발을 사서 이에요시의 판단으로 이듬해 철회를 하면서, 다다쿠니는 실각하고 덴포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후 다다쿠니를 노중에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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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에요시는 [[도이 도시쓰라 (1789년)|도이 도시쓰라]], [[아베 마사히로 (1819년)|아베 마사히로]], [[쓰쓰이 마사노리]] 등에게 정치를 맡기고 요시나가 붕당 사건에 개입해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키고, [[미토 번]]의 영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에 은거, 근신을 명령했다. 또한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 시치로마에게 히토쓰바시 가문을 상속시켰다. ([[도쿠가와 요시노부|히토쓰바시 요시노부]])
 
[[1853년]]([[가에이]] 6년) [[6월 3일]], [[미국]]의 [[매튜 페리]]가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 ([[흑선 내항]]) 막부 각료들이 그 대책에 부심하는 가운데 [[6월 22일]] 향년 59세로61세로 사망하게 된다. 더위를 먹고 쓰러진 것([[열사병]]에 의한 [[심부전]])이 죽음의 원인이 알려져 있다.<ref>[[篠田達明]]『徳川将軍家十五代のカルテ』([[新潮新書]], [[2005년]] 5월, {{ISBN|978-4106101199}})より。また、[[謎解き!江戸のススメ]]([[BS-TBS]], [[2015년]] [[3월 9일]] 방송)でも紹介された.</ref>
 
== 용모 ==
56번째 줄:
{{전거 통제}}
 
[[분류:1794년1793년 태어남]]
[[분류:1853년 죽음]]
[[분류:도쿠가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