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 이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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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이름=영빈 이씨<br><small>暎嬪 李氏</small>|사망일={{사망일과 나이|1764|7|26|1696|7|18}} {{font color|gray|(음력)}}|출생일={{출생일|1696|7|18}} {{font color|gray|(음력)}}|사망지=[[조선]] [[한성부]] [[경희궁]] 양덕당|부친=이유번|모친=[[한양 김씨]]|가문=[[전의 이씨]]|배우자=[[조선 영조|영조]]|자녀='''1남 6녀'''
{{왕족 정보
----[[조선 장조|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br>조졸 옹주 3명|능묘=[[수경원]](綏慶園, [[서오릉]] 내 위치)
|이름 = 영빈 이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작위=조선 영조의 후궁|시호=소유(昭裕)|별칭=선희궁(宣禧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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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숙의 이씨 (淑儀 李氏) <br /> 귀인 이씨 (貴人 李氏)
|시호 = 의열(義烈), 소유(昭裕)
|배우자 = [[조선 영조|영조]]
|자녀 = [[화평옹주]], [[화협옹주]], [[조선 장조|장조]], [[화완옹주]] 외 조졸 3녀
|휘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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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조선 왕조]]
|아버지 = 이유번(李楡蕃)
|어머니 = 한양김씨(漢陽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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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 손자 [[조선 정조|정조]], [[의소세손]]
|출생일 = [[1696년]] [[8월 15일]] ([[음력 7월 18일]])
|출생지 = [[조선]]
|사망지 = 창경궁 집복헌(集福軒)
|사망일 = [[1764년]] [[8월 23일]] ([[음력 7월 26일]])
|사망원인 =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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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1.jpg|섬네일|200px|영빈 이씨 은인 (1899년 제작)<ref>{{서적 인용|저자=국립고궁박물관|제목=왕의 상징 어보|연도=2012-07-27|출판사=국립고궁박물관|id=ISBN 978896325901703600|쪽=238}}</ref>]]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2.jpg|섬네일|200px|영빈 이씨 은인의 인면]]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8월 15일]]([[음력 7월 18일]]) ~ [[1764년]] [[8월 23일]]([[음력 7월 26일]]))는 [[조선]]의 제21대 왕 [[조선 영조|영조]]의 총관후궁이다. 본관은 [[전의 이씨|전의]](全義)로,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1.jpg|섬네일|220x220px|영빈 이씨 은인 (1899년 제작)<ref>{{서적 인용|저자=국립고궁박물관|제목=왕의 상징 어보|연도=2012-07-27|출판사=국립고궁박물관|id=ISBN 978896325901703600|쪽=238}}</ref>]]
보통 그의 처소를 선희궁(宣禧宮)이라 부른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친할머니로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다. 첫 시호는 의열(義烈)로 이후 의열궁(義烈宮)으로 불렸다가 다시 소유(昭裕)로 시호가 바뀌었다.
[[파일:Royal Seal of Lady Yi, Yeongbin 02.jpg|섬네일|220x220px|영빈 이씨 은인의 인면]]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8월 15일]]([[음력 7월 18일]]) ~ [[1764년]] [[8월 23일]]([[음력 7월 26일]]))는 [[조선]] [[조선 영조|영조]]의 후궁이며, [[조선 장조|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할머니이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낳았다.
 
==생애==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1726년]] 11월 16일 영조의 승은을 입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내명부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 탄생과 후궁 책봉 ===
슬하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및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1남 6녀, 모두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화완옹주를 제외한 6명의 자식들이 살아 생전에 요절했으며 그 중 한 명인 사도세자는 비참한 죽음을 겪었다.
본관은 [[전의 이씨|전의]](全義)이며 [[1696년]](숙종 22년) 7월 18일, 아버지 이유번(李楡蕃)과 어머니 한양 김씨(김우종의 딸)의 딸로 태어났다.
[[파일:Portrait of King Yeongjo.jpg|섬네일|[[조선 영조|영조]] 어진]]
[[1701년]](숙종 27년), 6세의 나이로 대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으며, [[1726년]](영조 2년) 11월 16일,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31세에 영조의 승은을 입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ref>《[[승정원일기]]》 627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년 청 옹정(雍正) 4년) 11월 16일 (갑진)
----○ {{Font color|gray|傳曰, 李氏爲淑儀。}}
----이씨(李氏)를 숙의(淑儀)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ref>
 
[[1727년]](영조 3년) 4월, [[화평옹주]]를 낳았는데, 화평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대단히 각별하였다.
[[인원왕후]]는 영빈 이씨가 거처를 옮기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보고 창경궁 집복헌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을 내렸다.
 
[[1728년]](영조 4년) 8월, 둘째 옹주를 낳고 그해 10월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ref>《[[승정원일기]]》 672책 (탈초본 37책) 영조 4년(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10월 8일 (을유)
영빈 이씨는 마침내 [[1735년]] 왕자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출산하였고 사도세자 출생 당시 영조 역시 그녀의 곁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 {{Font color|gray|傳曰, 淑儀李氏爲貴人。}}
----숙의 이씨를 귀인(貴人)으로 삼으라고 전교하였다.</ref>
 
[[1729년]](영조 5년) 12월, 셋째 옹주를 낳았으며 다음해인 [[1730년]](영조 6년) 내명부 정1품 '''영빈'''(映嬪)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조선 진종|효장세자]]의 3년상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조선 경종|경종]] 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의 국상중에 길례를 치러 조정과 민간에서 탄식하였다.<ref>《[[영조실록]]》 28권, 영조 6년(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11월 27일 (임진)
[[파일:사도세자.jpg|섬네일|left|180px|아들 [[조선 장조|사도세자]]<br/>(작자 미상의 무속화, 19세기 작)]]
----'''귀인 이씨를 봉하여 영빈으로 삼다'''</ref>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협옹주는 병을 얻어 숨졌다.
 
[[1732년]](영조 8년) 2월에 넷째 옹주를 낳았고, 다음해에 다섯째 옹주인 [[화협옹주]]를 낳았는데, 영빈 이씨가 다섯 옹주를 연이어 낳자, 효장세자 사후 후사를 바라던 영조는 크게 근심하였다.<ref>《[[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3월 8일 (기축)
고명아들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성격,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갈등했다. 이로 인한 정신병과 우울증을 얻어 살인과 비행을 일삼았다.
----'''영상·우상 등이 영빈 이씨가 남아를 출산하도록 기도하는 일을 앙주하다'''
----약방(藥房)과 영상(領相)·우상(右相)이 청대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영빈 이씨(暎嬪 李氏)가 연달아 네 명의 옹주를 출산했고 또 임신했으므로 남아(男兒)를 출산하는 경사가 있기를 상하가 기축(企祝)하였으나, 어제 또 옹주([[화협옹주]])를 출산하였다.
 
대신들이 임금께서 실망하여 지나치게 염려할까 두려워하여 각기 위로와 면려의 말을 진달하였다.
한편 사도세자에게 아들 다섯이 태어나면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 대신 손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택하려 했다.
 
송인명(宋寅明)이 고매(高禖, {{Font color|gray|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신의 이름}})에게 빌고 명산(名山)에 기도하는 등의 일을 앙주(仰奏)하니,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상태에서 자신의 후궁을 살해하고, 영조의 시해까지 운운하자 며느리와 세손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간하고 결국 세자는 쌀 담는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영조는 자신의 꿈에 [[정성왕후]]가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예지해 준 적이 있다며, 사도세자를 처분하기로 결심했을 때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의 계시와 생모 영빈이씨의 밀고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내가 어찌 이 일 때문에 침식(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다만 삼종(三宗, [[조선 효종|효종]] · [[조선 현종|현종]] · [[조선 숙종|숙종]])의 혈맥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평상시와 같지 못한 것뿐이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 [[정치달]]을 잃고, 말년에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서인(평민)으로 강등된 뒤, 유배에 처해져 정처(鄭妻)로 격하되는 등 질곡을 겪었다.
 
하였다.</ref>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태어난 세명의 옹주는 모두 다섯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사후==
자식들과 손주들([[의소세손]], 화완의 딸 등)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1735년]](영조 11년), 아들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출산하였다.<ref>《[[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
뒷날, [[대한제국 고종|고종]]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며, [[수경원]](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 [[칠궁]]에 올랐다.
----'''영빈 이씨가 원자를 집복헌에서 탄생하다'''</ref> 영조는 기뻐하며 다음해에 세자로 책봉하였다.<ref>《[[영조실록]]》 41권, 영조 12년(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3월 15일 (기유)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ref>
{{인용문|영빈 이씨가 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br>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br>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br>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br>
 
<center>(중략)</center>
처음 [[양주군]] 연희궁 대야동 미향(楊州 延禧宮 大野洞 未向, 미향은 남남서) 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1969년에 영빈이씨의 묘를 서오릉에 이장하였다.<ref>[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372386 연세대 영빈 이씨 수경원 터의 봄] {{웨이백|url=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372386 |date=20151208134324 }} 중앙일보</ref>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br>
 
"삼종(三宗, [[조선 효종|효종]] · [[조선 현종|현종]] · [[조선 숙종|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br>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br>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br>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그녀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은 그녀가 죽은 [[1764년]]에 건립되어 의열묘(義烈廟) 또는 의열궁이라 불리다가 [[1788년]] (정조 12년)에 비로소 선희궁이 되었다.
<br><br>|《[[영조실록]]》 40권,<br>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align=center}}
사도세자를 낳았으나, 사도세자 또한 여느 후궁 소생의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생후 100일만에 영빈과 떨어져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처소의 궁인들에게 양육되었다.
 
[[1738년]](영조 14년) 여섯째 딸인 [[화완옹주]]를 낳았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는데, 화완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 모두 영빈 이씨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으나, [[1870년]] (고종 7년)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 (순종 2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기는 등 변동이 잦았다.
 
=== 임오화변 ===
현재는 모든 칠궁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존재하고 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참고|임오화변}}
[[파일:사도세자.jpg|섬네일|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무속화 (작자미상)]]
[[조선 영조|영조]]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갈등이 심화되고, 영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사도세자의 울화병과 정신병이 심해지는 가운데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영빈 또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ref>《[[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ref>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였다.
{{인용문|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조선 장조|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br>안에다 엄히 가두었다.<br>
 
처음에 [[조선 진종|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br>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br>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br>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br>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br>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br>
<center>(중략)</center>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br>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br>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br>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center>(중략)</center>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br>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br>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center>(중략)</center>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br>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font color||#fff242|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br>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br>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br>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br>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조선 정조|정조]])이 황급히 들어왔다.<br>임금이 빈궁(嬪宮,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br>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br><br>|《[[영조실록]]》 99권,<br>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align=center}}
이후 영조의 명으로 세손([[조선 정조|정조]])이 사도세자가 아닌 [[조선 진종|효장세자]]의 승통을 이을것을 명하자 충격을 받고 슬퍼하였다.
 
=== 사망 ===
[[1764년]](영조 40년) 7월 26일, [[경희궁]]의 양덕당에서 사망하였다.<ref>《[[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7월 26일 (병자)
----'''영빈 이씨가 연서하다'''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연서(捐逝)하였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혜빈궁(惠嬪宮)이 《의례(儀禮)》 경전에
 
‘서자(庶子)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글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다.
 
영빈이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ref> [[조선 영조|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직접 영빈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국왕이 후궁의 지문을 지은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빈 이씨의 청화백자 묘지명은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사위인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글씨를 썼다. 또한 영빈의 일을 기록한 《표의록(表義錄)》을 직접 작성하였다.
 
영빈 이씨의 묘소는 의열묘(義烈墓)로 양주 연희궁 대야동 언덕에 묻혔는데 오늘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이다. 의열묘는 [[대한제국 고종|고종]] 대에 사도세자가 [[조선 장조|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수경원(綏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일대에 있었으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으로 이전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영빈의 묘인 의열묘를 [[칠궁|선희궁]](宣禧宮)으로 칭하였으며<ref>《[[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2월 26일(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계축)
----'''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확정하다'''</ref>, 후에 선희궁은 임금을 낳은 후궁들을 배향하는 [[칠궁]](七宮)을 구성하는 사당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 소유(昭裕)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 영화 ===
* [[2014년]] 영화 《[[사도 (영화)|사도]]》 (배우:[[전혜진 (1976년)|전혜진]])
 
== 같이 보기 ==
* [[정빈조선 이씨영조|영조]]
* [[조선정빈 장조이씨]]
* [[조선 정조장조|사도세자]]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 [[조선 정조|정조]]
*[[한중록]]
*[[임오화변]]
*[[화완옹주]]
* [[선희궁터]]
*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
 
== 각주 ==
<references/>{{조선의 후비와 대한제국의 후비}}{{전거 통제}}
<references/>
 
{{전거 통제}}
[[분류:1696년 태어남]]
[[분류:1764년 죽음]]
[[분류:조선 영조]]
[[분류:조선 정조]]
[[분류:조선 장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