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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인 =
|자녀 = 정학초(丁學樵)
|부모 = [[정재원 (1730년)|정재원]](丁載遠)(부)<br />윤소온(尹小溫
|가족 = [[정약현]] (형)<br />[[정약종]](동생)<br />[[정약용]](동생)
|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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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조선 정조|정조]] 7년) [[사마시]](소과)에 합격했다.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 (1756년)|이승훈]]의 주도로 [[김범우]]의 집에 세운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에서 동생 [[정약종|약종]]과 [[정약용|약용]], [[이벽]] 등과 함께 주일 [[미사]]와 [[설교|강론]] 등 천주교 종교 활동을 했고, [[가성직제도]] 하에서 사제직까지 수행하면서 초기 천주교 전파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동생들은
1790년(정조 14년) [[증광시|증광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와 병조좌랑(정6품)을 지냈다. 1798년(정조 22년), 정조의 명으로 [[경상도]] 출신 인물들을 평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편찬에 참여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황사영 백서|백서 사건]]으로
1816년(순조 16년), 유배 16년 만에 내흑산 우이도(牛耳島)에서
==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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