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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김상헌
| 원래 이름 = 金尙憲
| 출생일= [[1570년]]{{출생일|1570|06|03}}
| 출생지= [[조선]] [[한성부]]
| 사망지= [[조선]] [[한성부]]
| 사망일= [[1652년]]{{사망일과 (향년 83세)나이|1652|06|25|1570|06|03}}
| 거주지= 조선 한성부
| 정당 = 서인 잔존 후예 세력
| 웹사이트=
}}
'''김상헌'''(金尙憲, [[1570년]] ~[[6월 3일]]~[[1652년]] [[6월 25일]])은 [[조선]] 중·후기의중기의 문신이며문신이자 학자이다[[성리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조선 효종|효종]]의 묘정에 종사되었다.<ref name="역사정보" />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며.<ref name="역사정보" /> 본관은 [[신 안동 김씨|신 안동]]이다. 월정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 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1570년(선조 3년) 6월 3일 서울 남쪽 외가에서 [[돈녕부]]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의 사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좌의정]]을 역임한 [[정유길]]의 딸이다. 3세 때, 후사 없이 별세한 백부 김대효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친아버지 김극효 슬하에서 성장했다.
3세 때 백부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월정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소학]]》 공부에 힘썼으며 우계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ref name="역사정보"> [http://yoksa.aks.ac.kr/jsp/cc/View.jsp?cc10id=C0000021&keywords=%EA%B9%80%EC%83%81%ED%97%8C%20%E9%87%91%E5%B0%99%E6%86%B2%20%EF%A4%8A%E5%B0%99%E6%86%B2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f>
 
3세1585년(선조 때 백부 김대효에게 출계(出系18년)하였다. 월정부터 [[윤근수이황]]의 문하에서문인 수학하였고,월정 [[소학윤근수]] 공부에문하에서 힘썼으며수학했고, 우계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ref name="역사정보"> [http://yoksa.aks.ac.kr/jsp/cc/View.jsp?cc10id=C0000021&keywords=%EA%B9%80%EC%83%81%ED%97%8C%20%E9%87%91%E5%B0%99%E6%86%B2%20%EF%A4%8A%E5%B0%99%E6%86%B2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f>
[[1590년]]에 진사가 되고,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예조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32세 때인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1590년]](선조 23년)진사가진사시에 되고합격하고,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예조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32세 때인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1601년]](선조 34년)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기록을 남긴 것이 제주 기행문《남사록(南槎錄)》이다.
 
=== 북인과의 갈등 ===
{{참고|병자호란|정축하성|삼전도비|삼전도의 굴욕|남한산성}}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고 [[조선 인조|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 (1586년)|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이 정해지자 6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교수 자살을 기도했으나 발견되어 실패했는데, 최명길은 이를더러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수나 있겠냐며 쇼를 한 것이라 비난했다. [[정축하성]](소위 삼전도 굴욕) 때 인조를 따라가지 않고 남한산성 뒷문으로 나가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갔다.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안동시|안동]] 소산으로 은퇴하였다.
 
[[1638년]]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파일:Samjeondo Monument 02.JPG|썸네일|오른쪽|120px|[[삼전도비]]]]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의 거듭된 요구로 1640년 심양으로 압송되어<ref>조선왕조실록, 인조 18년 12월 8일의 기사, 김상헌이 서울에 와 왕에게 하직을 고하다</ref> 만주 심양감옥에서4년 그리고 평안도 의주감옥에서2년 옥고후 6년뒤에야 완전히 풀려났다.<ref>조선왕조실록,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 청 순치(順治) 2년) 2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 영의정 [[최명길 (1586년)|최명길]], 영[[중추부]]사 이경여, 전 판서 김상헌이 심양에서 돌아오다</ref> [[선양 시|선양]](瀋陽)에 잡혀 있을 때, 여진족은 수시로 회유하였으나, 그는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타협 요구를 거절하고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ref name="역사정보" />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1649년 [[대학자]]로 존경을 받는 가운데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차례 거절하며 은퇴의 뜻을 밝히고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육]]이 추진하던 [[대동법]] 시행을 [[김집 (1574년)|김집]] 등과 함께 강력 반대하기도 하였다.
* 《야인담록(野人談錄)》
* 《독례수초(讀禮隨)》
* 《남사록(南錄)》
* 《청음전집》 40권
 
=== 영화 ===
* [[김윤석 (배우)|김윤석]] - 《[[남한산성 (영화)|남한산성]]》 (2017년)
 
=== 소설 ===
* [[남한산성 (소설)|남한산성]] (2007년, [[김훈 (소설가)|김훈]] 작)
 
== 같이 보기 ==
* [[정묘호란]]
* [[김상용]]
* [[최명길 (1586년)|최명길]]
* [[강홍립]]
*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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