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 지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118번째 줄:
 
=== 고고학적 조사 ===
1990년 도호쿠 전력이 작성한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당시 아베 히사시의 고고학적 연구결과 등을 종합한 쓰나미 퇴적물 높이, 침수 영역 연구가 존재하지만 유적의 쓰나미와 관련된 퇴적물 조사 검토는 이뤄지지 않았다.<ref name="Abe1990"/>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이뤄진 [[다가조시]] 이치카와바시에서 열린 제26, 27회 조사에서는<ref>[http://sitereports.nabunken.go.jp/10249 『市川橋遺跡 城南土地区画整理事業に伴う発掘調査略報2』多賀城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59集](多賀城市教育委員会2000)</ref> 구 [[스나오시강]] 물길 인근에 있는 남북대로가 침식된 흔적인 특정 퇴적물(SX1779)가 발견되어 규조 분석을 실시했다.<ref>[http://sitereports.nabunken.go.jp/9364 市川橋遺跡第一分冊 多賀城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75集](多賀城市教育委員会2004)</ref><ref>[http://sitereports.nabunken.go.jp/9400 市川橋遺跡第二分冊 多賀城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75集](多賀城市教育委員会2004)</ref><ref>[http://sitereports.nabunken.go.jp/10092 市川橋遺跡第三分冊 多賀城市文化財調査報告書第75集](多賀城市教育委員会2004)</ref> 그 결과 바다 생물도 발견되지 않았고 바닷물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을 순 없었다. 도호쿠 대학에서도 규조 분석을 실시했으나 마찬가지로 바다 생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 퇴적물이 쓰나미로 바다에서 직접적으로 휩쓸려 온 퇴적물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ref>菅原大助・箕浦幸治・今村文彦 「[http://www.tsunami.civil.tohoku.ac.jp/hokusai3/J/publications/pdf/vol.18_1.pdf 西暦869年の貞観津波による堆積作用とその数値復元]」『津波工学研究報告』第18号、1-10、2001年、東北大学大学院工学研究科災害制御研究センター</ref>
 
그 후 다가조성 아래까지 쓰나미가 닿았다는 일본삼대실록의 서술을 둘러싸고 야나기사와 가즈아키라<ref>[http://gatetagajyo.web.fc2.com/pdf/tagajyo_jyougantunami.pdf]柳澤和明2011「貞観地震・津波からの陸奧国府多賀城の復興」NPOゲートシティ多賀城 柳澤和明2013「発掘調査より知られる貞観一一年(八六九)陸奥国巨大地震・津波の被害とその復興」『史林』96-1 史学研究会 ほか</ref>와 도키노 히로히코<ref>斎野裕彦(2012)「[http://archaeology.jp/about/award/saino2012.pdf 仙台平野中北部における弥生時代・平安時代の津波痕跡と集落動態]」 東北芸術工科大学東北文研究センター編 2015年には第4回[[日本考古学協会]]奨励賞を受賞した。</ref>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ref>「宮城県における歴史地震・津波災害-考古学的検討を今後より深めるための第一歩-」『宮城考古学』第15号、25-106、2013年、宮城県考古学会、ISSN 1348-1924</ref> 토층 아래 퇴적물 구조 분석과 규조 분석에서는 다가조성 아래 거의 대부분 지역이 쓰나미 퇴적층으로 덮여 있다는 설이 우세하다.<ref>[https://sitereports.nabunken.go.jp/54312]相原淳一・野口真利江・谷口宏充・千葉達朗2019「貞観津波堆積層の構造と珪藻分析― 宮城県多賀城市山王遺跡東西大路南側溝・山元町熊の作遺跡からの検討―」『東北歴史博物館研究紀要』20 P17-44</ref>
 
== 역사적 영향 ==
864년 조간 시기에는 [[후지산]]의 분화, 869년 조간 지진과 쓰나미, 같은 해 역병 유행 등이 겹치면서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는 이른바 궁정정치(宮廷政治)가 조성되며 궁정문화도 이뤄졌다.<ref>「災害が政治整え 宮廷文化生む」五味文彦(東大名誉教授)日本経済新聞2014年6月5日夕刊14面</ref>
 
도호쿠 지방에서는 조간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915년 도와다 화산까지 분화하면서 미야기현 북부, 이와테현, 아키타현의 논이 전부 화산재에 묻혀 복구되지 않았다. 아키타현 북부에서는 [[화산쇄설류]]에 묻혀버린 여러 가옥들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런 거대한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은 도호쿠 지방은 권력공백 상태에 빠지고, 피해 지역이 사유지화되고 에조민들이 침투하면서 피해 지역이 쉽게 복구되지 못했다.<ref>相原淳一2018「多賀城と貞観津波」『考古学雑誌』第101巻第1号、日本考古学会</ref>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