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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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부산]]에서 태어났다. [[1930년]] 가족과 함께 도일, [[오사카|오사카부]]에 살았다. 여기서 나중에 야나가와구미의 2대 조장이 되는 재일한국인 강동화(康東華, 일본명 다니가와 고타로(谷川康太郎)와 알게 됐다. [[1941년]] 강제동원 형태로 오이타현 군수공장 부근으로 가족이 이주했다. 1945년 해방 후 가족은 귀국했지만, 양원석은 출국 직전에 싸움에 휘말려 체포된 탓에 혼자서 일본에 남게 됐다. 이후 어둠의 세계로 흘러들어갔다. [[1958년]] '사카우메구미'(酒梅組) 계열의 '기토구미'(鬼頭組, 조직원 100명)에 단 8명이 쳐들어간 일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 일로 9개월간 복역한 뒤 같은해 11월에 야나가와구미를 창설했다. [[1959년]]부터 야마구치구미와 연결됐다. 야마구치구미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성기 야나가아구미는 조직원이 약 2천명에 이르렀다. 경찰의 집중 단속을 받고 [[1969년]] 야나가와구미를 해산했다. 이후 이름을 다카시(魏志)로 바꾸고 '아시아민족동맹'(亜細亜民族同盟)을 설립했다. 일본 IBF 설립에 관여, 커미셔너로 일하기도 했다. [[1988년]] [[미야기현]] 민단 지부장이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한국 정부로부터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한국 보안사의 일본 내 파이프 역할을 했다는 소리도 있다. [[최배달최영의]]와도 의형제로도친분이 알려졌다있었다. [[1991년]]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분류:1923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