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록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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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강원도]]에서 태어났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10대 때 혼자서 도일, 오사카에서 술집 보이로 일했다. 음식점을 운영하다가 나중엔 캬바레를 운영했다. [[1953년]] 오사카에오사카 [[도톤보리]]에 후지캬바레를 열었다. [[1957년]] 제3대 [[야마구치구미]] [[다오카 가즈오]] 조장 수하에 들어가 '후지카이'를 결성했다. 경찰의 검거 작전 이후 [[1966년]] 조직을 해산하고 은퇴했다. 이후 '후지관광'이라는 회사를 운영했다.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주 오사카 총영사관 건설 기성회'가 발족했을 때 회장이 됐다. [[2003년]]한국인에게는 민단땅을 오사카팔지 본부않자, 한록춘이 일본인 부인 명의로 땅을 사서 나중에 '대한민국' 명의로 바꿨다<ref>월간조선 2010년 고문2월호, [[2006년]최초 인터뷰] 민단간사이 중앙본부재일동포 상임고문이사회의 됐다.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2003년]] 민단 오사카 본부 고문, [[2006년]] 민단 중앙본부 상임고문이 됐다.
 
== 고국에 대한 기여 ==
* 김종필씨가 1971년에 국무총리가 됐을 때, '한국 경찰에 사이드카가 없다'고 해서 80대를 사서 보내줬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육영수]] 여사가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짓는데 건설비가 없다고 해서 1억 엔을 보냈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무교동에 대한체육회 건물을 지을 때도 한록춘과 이희건 회장 등 세 명이 엘리베이터를 놔줬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강원일보가 인쇄기, 등사판 등이 부족하다고 해서 일본에서 사서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이희건씨가 오사카 흥은(興銀) 이사장 출마할 때 후지카바레 수입금 전부를 흥은에 입금해서 돕기도 했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훈장 등 ==
* 1971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당시 무궁화장을 받은 사람은 두 명. 다른 한 명은 신한은행 설립자인 이희건(李熙健)씨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해외동포 42명을 '건국 60주년 행사'에 초청했다. 한녹춘 회장은 42명 가운데 한 명으로 추천돼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기타 ==
* 키 160㎝의 단신이었다.<ref>월간조선 2010년 2월호, [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 韓綠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살기 위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야쿠자가 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002100047</ref>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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