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귈라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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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300명의 앵귈라인들이 [[세인트 키츠 섬]]에게 지원받은 [[사략|사략선]] 2기를 몰고 이웃한 [[생마르탱]]의 절반을 침공하여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 (1748년)|엑스라샤펠 조약]] 때까지 보유한 바 있다. 그 후 1745년, 2대의 프랑스 [[프리깃]]이 앵귈라의 크로쿠스 베이에 700명 또는 1000 {{Sfnp|Martin|1839}}명의 병력을 상륙 시켰으나 호지 총독 휘하의 민병대 150명에 의해 격퇴되었다.
 
1796년 11월 27일, <ref>Roche, p.145</ref>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 전함 ''[[프랑스 콜베트함 데키우스 (1795)|데키우스]]''와 ''[[프랑스 브리그 바일란테 (1793)|바일란테]]는'' [[빅토르 위그]]의 지휘 아래 랑데부 베이에 400명의 프랑스인을 상륙시켰다. {{Sfnp|Martin|1839}} 이들은 사우스 힐과 현 수도 더 밸리의 마을들을 파괴하였지만 앵귈라인들은 샌디 힐 포트 근처의 ''롱 패스''에서 재집결했다. 바튼 선장 아래 세인트 키츠 섬에서 항해한 프리깃 [[HMS 랩윙 (1785)|HMS ''랩윙'']]이 {{Sfnp|Martin|1839}} 프랑스 전함들을 격파 할 수 있었고 프랑스의 공격은 다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앵귈라를 이전에 노예가 된 아프리카 인을 고용하여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체제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섬의 토양과 기후는 이에 적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농장들은 크게 실패한다. 앵귈라의 인구는 이 때 약 10,000명에서 2,000명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19년에는 유럽인 360명, 노예가 아닌 아프리카인 320명, 노예 2451명이 있었다. {{Sfnp|Martin|1839}} 1830년대, 영국은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농장주들은 그에 따라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자유민들은 농부와 어부로서 앵귈라에서 계속 생계를 유지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가뭄과 기근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섬의 전체 인구를 [[영국령 기아나]] (현재 [[가이아나]][[데메 라라|)의 데메라라]] 로 이주시키려고 했으나 대부분은 남는 걸 선택했다. 19세기, 섬 중앙에 있는 큰 호수에서 소금이 개발되었고 이는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매년 약 3,000,000 [[부셸]]이 생산되었다. {{Sfnp|Martin|1839}} 이로 인해 섬의 주요 무역이 형성되었고 소금뿐 만 아니라 [[설탕]], [[면섬유|면화]] 및 [[담배]] 도 생산되었다. {{Sfnp|EB|1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