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고쿠 다카쓰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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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교고쿠씨는 키타오미의 수호로 본래는 [[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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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묘로 가는 길 ===
히데요시의 후궁이 된 여동생 다쓰코의 탄원 등에 의해 다카쓰구는 허락되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고, 덴쇼 12년(1584년)에 오미국 다카시군 2,500석을 수여받았다. 다음해에는 5,000섬으로 가증되었다. 또한 같은 해 [[규슈 평정]]에서의 공으로 1만 석에 가증되었고,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의 공으로 오미하치만 산성 2만 8,000석이 되었고,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간파쿠에 취임하자 종5위 시모시종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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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4년(1595년)에는 [[오미국|오미]] [[오쓰성]] 6만 석으로 가증되어 종4위 사근위 소장에도 임명되었다. 오츠성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사카모토 성의 후계로서 히데요시의 친족인 아사노 나가마사가 쌓아 올린 것이다.시가군에 있는 남서 오미의 요충지였다. 이듬해 하시바의 성씨 공칭도 허용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종3위 참의(재상)에 임명된다.
이 무렵의 다카쓰구의 출세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여동생이나 아내의 뒷덜미(규벌)에 의지했다고 해 다카쓰구는 뒤에서 '''형대명'''({{lang|ja|かれた大名}})이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오미국 지배를 원활히 진행시키고 싶은 도요토미 가문은, 아사이 가문 이전에 다이묘인 [[하시바씨|하시바 가문]]의 초창지인 기타오미의 대대로 영주였던 교고쿠 가문의 명망을 이용하는 목적이 있었다.
=== 오쓰 농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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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카사국주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의 군세를 오쓰로 끌어당겨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하지 않은 다카쓰구의 공적을 높게 평가했다.타카츠구는 이 나오마사로부터의 사자를 받아 조속히 고야산을 내려오도록 전해진다. 처음에 다카쓰구는 이를 거절했으나, 다시 [[야마오카
[[오사카 전투]]를 앞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숨으로 고차는 새로 일본해와 기타가와와 남천에 둘러싸인 웅핑에 [[니조성]]에 비슷한 [[오바마성 (후쿠이현)|오바마성]](小浜城)을 쌓기 시작했다. 또 고세야마 산기슭에 남은 성터와 무가의 저택을 마치야로 삼아 거리를 정비하고 새로운 블록을 마련하는 등 오바마시의 성시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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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의 신임도 두터웠던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받았다.
[[게이초]] 14년(1609년) 5월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해, 장남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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