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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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본명 = <span style=font-size:90%>{{color box||고려 이름}}</span> 왕저(王㫝)
----<span style=font-size:90%> {{color box||몽고 이름}}</span> 미슈간도르지(迷思監朶兒只)
|출생지 =
▲ | 출생일= {{출생일|1338|1|9}}
|사망지 = [[고려]] [[강화도]]
▲ |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352|3|23|1338|1|9}}
|재위 = 1349년 5월 8일 ~ 1351년 10월 6일 {{font color|gray|(음력)}}
|능호 = [[총릉]](聰陵)
|왕비 = 미혼
| 어머니=[[희비 윤씨]]▼
| 후임자=[[고려 공민왕|공민왕]]▼
|자녀 = 없음
| 작위=[[고려의 역대 국왕|고려의 제30대 국왕]]▼
|별호 =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
}}
'''충정왕'''(忠定王, [[1338년]] [[1월 9일]]([[1337년]] [[음력 12월 9일]]) ~ [[1352년]] [[3월 23일]]([[음력 3월 7일]]))은 [[고려]]의 제30대 [[고려의 국왕 목록|국왕]](재위: [[1349년]] ~ [[1351년]])이다.
휘는 '''저'''(胝), 작호는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이고,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몽골 이름은 '''미슈간도르지'''(迷思監朶兒只)이다. 폐위되었으므로 고려 내에서 자체적으로 추숭한 존호나 시호는 없고 원나라에서 '충정(忠定)'의 시호를 내려 ''''충정대왕'''(忠定大王)'으로 일컫는다.
[[고려 충혜왕|충혜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희비 윤씨]]이며, 이복형인 [[고려 충목왕|충목왕]]이 후사 없이 요절하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 외척인 윤시우와 배전 등의 발호로 정사가 문란해졌고, [[왜구]]의 빈번한 침입이 이어지는 등 내우외환을 겪다가 숙부 [[고려 공민왕|공민왕]]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독살되었다.
== 생애 ==
===
[[1337년]](충숙왕 후6년) 12월 9일, [[고려 충혜왕|충혜왕]](忠惠王)과 [[희비 윤씨]](禧妃 尹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희비 윤씨는 [[파평 윤씨]]이며, 찬성(贊成) [[윤계종]]의 딸로 고려 여인이었다.
[[1348년]](충목왕 4년) 4월,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그해 12월 [[고려 충목왕|충목왕]]이 요절하자, 대신들이 원나라에 표문을 보내어 [[고려 충혜왕|충혜왕]]의 서자인 경창부원군(충정왕)과, 동생인 강릉대군(江陵大君, [[고려 공민왕|공민왕]]) 중 한명을 택하여 고려의 국왕으로 세워줄 것을 청하였다.
다음해인 [[1349년]] 2월, 원나라에서는 확답을 내려주지 않은 채 충정왕을 원에 입조하게 하였으며 3개월이 지난 5월에서야 충정왕을 새로운 고려 국왕으로 정하고 왕위를 계승할 것을 명하였다.<ref>《[[고려사]]》 권37, 세가 권제37, 충정왕 원년(1349년) 5월 8일 (무술)
----'''원 황제가 왕저를 국왕으로 정하다'''
----5월 무술, 원(元) 황제가 원자(元子) 왕저(王㫝)에게 왕위를 계승하라고 명하였다.</ref>
=== 즉위와 폐위 ===
충정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고려 충목왕|충목왕]]의 어머니인 [[원나라]] 출신의 [[덕녕공주]]와 충정왕의 어머니인 [[희비 윤씨]] 및 [[윤계종]] 등 왕의 외척들이 정권을 두고 갈등하였는데, 얼마 후 덕녕공주가 원나라로 입국하면서 자연스럽게 희비와 그 일족, [[기철]]을 비롯한 부원배와 권문세족들이 관직을 차지하였다.
[[1350년]](충정왕 2년), [[왜구]]가 경상도 해안가를 습격하였는데, 이때부터 왜구의 습격이 본격화 되어 [[고려 공민왕|공민왕]]과 [[고려 우왕|우왕]]때까지 이어졌다. 왜구는 장흥, 동래, 남해현을 침략하여 많은 피해를 끼쳤다.
이러한 혼란 속에 [[1351년]](충정왕 3년), 윤택(尹澤)과 이승로(李承老) 등은 [[원나라]]에 투서를 보내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충정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숙부인 강릉대군([[고려 공민왕|공민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ref>《[[고려사절요]]》 권26, 충정왕 3년(1351년) 10월 6일 (임오)
----'''원이 충정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을 세우다'''
----[[원나라]]에서 강릉대군(江陵大君, [[고려 공민왕|공민왕]]) 왕기(王祺)를 왕으로 삼고, 단사관(斷事官) 울제이부카(完者不花)를 보내어 창고를 봉하고 국새를 거두어서 돌아가니, 왕은 [[강화도|강화]](江華)로 물러났다.</ref>
===
[[강화도]]로 쫓겨난 충정왕은 유배지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되자 근심과 걱정으로 울며 지냈다. 어머니 [[희비 윤씨]]가 [[고려 공민왕|공민왕]]에게 간청하여 직접 강화도에 가서 충정왕을 만나보고 오기도 하였다.<ref>《[[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ref>
[[1352년]](공민왕 1년) 독살되었다.<ref>《[[고려사]]》 권64, 지 권제18, 예6, 공민왕 원년(1352년) 3월 7일 (신해)
----충정왕(忠定王)이 [[강화도|강화]](江華)에서 독살 당했다.</ref> 폐위되어 고려 내에서 올린 시호는 없으며, [[1367년]](공민왕 16년) [[원나라]]에서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능은 [[개성]]에 있는 [[총릉]](聰陵)이다.
== 평가 ==
충정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 [[희비 윤씨|희비]]와 외척들이 전횡을 일삼았고 [[왜구]]가 출몰하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고려사]]》와 《[[동국통감]]》은 충정왕의 광패한 행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인용문|전왕('''충정왕''')이 일찍이 밤에 근시(近侍)들과 더불어
<br>이따금 철퇴로 사람을 쳐서 거의 죽게 하고, 혹은 겨울철에도 얼음이나 눈이 녹은 물을 가져다 얼은 밥을 말아서 먹기도 하였으니, 광패함이 이와 같았다.|《[[동국통감]]》 권46 고려기 공민왕1 }}▼
《[[동국통감]]》에서는 충목왕과 충정왕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인용문|“[[충목왕]](忠穆王)·충정왕(忠定王)은 모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덕녕공주]](德寧公主)와 [[희비 윤씨|희비]](禧妃)가 어머니라는 존귀한 위치로 안에서 권세를 부리고,<br> 간신과 외척은 밖에서 권세를 부리니, 두 임금이 비록 영리한 자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br><br> 또 충정왕의 때를 당하여 [[공민왕|강릉대군]](江陵大君)은 직접 숙부가 되므로 국인(國人)들의 마음을 얻었으며,<br> 또 [[원나라]]의 후원이 있었는데, 여러 윤씨(尹氏)들이 이런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당파를 만들어 사욕을 부렸으므로,<br> 화근을 빚어서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불행히 짐독(鴆毒)의 살해를 당하게 하였으니, 슬프다.” 하였다.|《[[동국통감]]》 권45 고려기 }}▼
▲
▲== 가계 ==
{| class="wikitable"▼
{{인용문|“[[충목왕]](忠穆王) · '''충정왕'''(忠定王)은 모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는데,<br>[[덕녕공주]](德寧公主)와 [[희비 윤씨|희비]](禧妃)가 어머니라는 존귀한 위치로 안에서 권세를 부리고,<br>간신과 외척은 밖에서 권세를 부리니, 두 임금이 비록 영리한 자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br>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br>
! rowspan="2" | 고려 제30대 국왕 ▼
▲| rowspan="2" |''' 충정대왕 '''<br> 忠定大王
▲
== 가족 관계 ==
<center>
{|▼
|
<center>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rowspan="2" | '''충정대왕''' <br>忠定大王
!출생
!사망
|-
|'''[[1338년]] [[1월 9일]]''' (<small>
|'''[[1352년]] [[3월 23일]]''' (<small>
----{{국기|고려}} [[강화도]] |}
=== 부모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colspan="2" |
!생몰년
줄 62 ⟶ 84:
|-
!부
|1315년 - 1344년
|
|-
!모
|
| ? - 1380년
▲|
|}
|}<
=== 자녀<ref name=":0" group="주" /> ===▼
* 서자 : [[왕제]](王濟)<ref name=":0" group="주">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개성 왕씨 족보에만 보인다.</ref>▼
▲=== 자녀<ref name=":0" /> ===
▲* 서자 : [[왕제]](王濟)<ref name=":0">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개성 왕씨 족보에만 보인다.</ref>
== 각주 ==
줄 98 ⟶ 116:
* [[윤언이]]
{{Col-end}}
{{전임후임|
전임자=[[고려 충목왕|충목왕]]|
후임자=[[고려 공민왕|공민왕]]|
대수=30|
직책=[[고려의 역대 국왕|
임기=[[
}}
{{전임후임|
줄 122 ⟶ 127:
후임자=[[고려 공민왕|공민왕]]|
직책=[[한반도]]의 국가 원수|
임기=[[
}}
{{고려의 왕자}}
{{고려의 역대 국왕}}
{{기본정렬:충정왕, 고려}}
[[분류:
[[분류:1352년 죽음]]
[[분류:고려의 왕]]
줄 137 ⟶ 143:
[[분류:독살된 사람]]
[[분류:살해된 군주]]
[[분류:칭기즈 칸의 후예]]
[[분류:14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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