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키 진자부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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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과 경력 ==
마사키 진자부로는 [[1876년]] [[사가 현]]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종군하였고종군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 제19기를 졸업하였다. 이 때 동기 중에선 후에 일본 육군 장성이 되는 [[아라키 사다오]], [[아베 노부유키]], [[혼조 시게루]]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맡았던 주요 직책으로 군무국 군사 과장, 근위 보병 제1연대장, 보병 제1여단장, [[일본 육군사관학교]]장, 일본제국 육군 제8사단장, 일본제국 육군 제1사단장, 타이완 주둔군 사령관, 참모 차장 겸 군사 참의관 등이 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 육사]] 시절에는 존황 절대주의 (尊皇絶對主義) 의 훈육에 노력하여 후에 [[2.26 사건]]의 주모자가 되는 안도 데루조 (安藤 輝三), 이소베 아사이치 (磯部 浅一) 등을 배출해냈다. [[1932년]] 참모 차장이 된 후에는 [[아라키 사다오]] 일본 육군 대신과 함께 국가 혁신을 도모하는 황도파를 형성하였다. 세력의 확대를 도모해 중견 장교들의 신망을 책임졌지만, 후에 당파적인 행동이 반발을 사 통제파를 등장시켰다. 직위는 참모 차장이었지만, 당시 일본의 참모 총장이었던 [[:ja:閑院宮載仁親王|간닌 고토히토 친왕]] 아래에서 사실상 참모 총장으로서 참모본부를 움직였고, [[만주 사변]]에서는 세력 확대를 주장했다.
 
특히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 육사]] 교장 시절에는 존황 절대주의 (尊皇絶對主義) 의 훈육에 노력하여노력해 후에 [[2.26 사건]]의 주모자가 되는 안도 데루조 (安藤 輝三), 이소베 아사이치 (磯部 浅一) 등을 배출해냈다. [[1932년]] 참모 차장이 된 후에는 [[아라키 사다오]] 일본 육군 대신과 함께 국가 혁신을 도모하는 황도파를 형성하였다. 세력의 확대를 도모해 중견 장교들의 신망을 책임졌지만, 후에 당파적인 행동이 반발을 사 통제파를 등장시켰다. 직위는 참모 차장이었지만, 당시 일본의 참모 총장이었던 [[:ja:閑院宮載仁親王|간닌 고토히토 친왕]] 아래에서 사실상 참모 총장으로서 참모본부를 움직였고, [[만주 사변]]에서는 세력 확대를 주장했다.
 
[[1934년]]에는 [[:ja:教育総監|교육 총감]]으로 취임해 [[천황기관설]] 문제에선 국체명징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천황기관설을 공격하였다. 이 흐름을 염려해 일본 육군의 개혁을 단행하려고 한 [[오카다 게이스케|오카다]] 내각의 [[하야시 센주로]] 일본 육군 대신과 일본 육군성 군무 국장 [[나가타 데쓰잔]] 소장이 [[1935년]] [[7월]], 그를 육군 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육군의 세 장관 가운데 하나인 교육 총감 직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후임에 [[:ja:渡辺錠太郎|와타나베 조타로]]를 앉혔다. 이 인사에 반발한 [[황도파]]의 [[:ja:相沢三郎|아이자와 사부로]] 일본 육군 중령이 [[8월]] [[:ja:相沢事件|아이자와 사건]]을 일으켜 [[나가타 데쓰잔]]을 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