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키 진자부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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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는 [[:ja:教育総監|교육 총감]]으로 취임해 [[천황기관설]] 문제에선 국체명징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천황기관설을 공격하였다. 이 흐름을 염려해 일본 육군의 개혁을 단행하려고 한 [[오카다 게이스케|오카다]] 내각의 [[하야시 센주로]] 일본 육군 대신과 일본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소장이 [[1935년]] [[7월]], 그를 육군 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육군의 세 장관 가운데 하나인 교육 총감 직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후임에 [[:ja:渡辺錠太郎|와타나베 조타로]]를 앉혔다. 이 인사에 반발한 [[황도파]]의 [[:ja:相沢三郎|아이자와 사부로]] 일본 육군 중령이 [[8월]] [[:ja:相沢事件|아이자와 사건]]을 일으켜 [[나가타 데쓰잔]]을 살해하였다.<ref>《히로히토:신화의 뒤편》189쪽</ref>
 
이후 육군의 개혁에 반발한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에 의해 [[2·26 사건]]<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51823595&code=100203 1936년 일본군 황도파 쿠데타]</ref>이 일어났고<ref>《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일본편)》195쪽~196쪽</ref>, 마사키 자신은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나, 진위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반란의 주모자인 안도 아키라와 아소베 아사이치 등의 실행 지지와 받아들이는 태도를 사건 전부터 나타내었고, 내각 조성 명령을 기대하면서 행동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돼 [[1936년]] [[7월]] 구류되어 헌병대 본부의 조사를 받은 후 반란 방조로 군법 회의에 기소되었지만, 사건 관여를 부인하였다. 논고 구형을 통해 금고 13년형을 받았지만, [[1937년]] [[9월]]의 판결로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로 인해 황도파의 힘이 쇠약해지고 통제파의 힘이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