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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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박종철 학생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다.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한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고,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ref>{{웹 인용|제목=고 박종철열사 25주기 추모제...(슬픔)|url=http://www.kdemo.or.kr/site/notification/event/925|출판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날짜=2011-12-29}}{{깨진 링크|url=http://www.kdemo.or.kr/site/notification/event/925 }}</ref> 당시 연행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요절했다. 11시 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가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해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303/99973330/1|제목=“물고문 보도… 내 생애 이런 신문을 다 보는구나 했다”|출판사=동아일보|날짜=2020-03-03}}</ref> 경찰은 14일 밤에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1946년 2월)|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511248.html|제목=부검 통해 드러난 고문사…경찰은 회유·협박 / 박정기|출판사=한겨레|날짜=2011-12-21}}</ref><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14632.html|제목=조국 “안상수가 박종철 고문은폐 막았다? 사실 아냐”|출판사=한겨레|날짜=2012-01-1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