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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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1549년]] [[11월 7일]]([[음력 10월 18일]])에 죽어 이듬해 3[[월]] [[양주]] [[장흥]]에 묻혔으나 덕흥대원군이 풍수가들의 말을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하였으며,<ref>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9, {{ISBN|9788950918941}}</ref>,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동작리(현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44-7번지) 그녀의 묘는 동작릉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후에 정1품 [[]](嬪)으로 다시 복작하여 안빈이라 부르다가 손자인 선조가 [[1577년]](선조 10) 그녀를 창빈이란 [[칭호]]로 개봉하고 하원군의 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했다.
 
선조는 자신이 서얼 출신이라는 것에 큰 콤플렉스를 가졌다. [[1578년]](선조 11) [[5월 11일]]에는 덕흥대원군 사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놓고 토의하던 중, 경연관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칭했다가 선조는 크게 분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