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왕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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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이 사사된지 7년이 지난 1513년(중종 8년) 음력 1월 7일, 당시 15살의 만손(萬孫, 또는 신능손)이라는 자가 나타나 자신이 양평군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만손은 주장하기를,
 
"남학동<ref>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남학동]].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16389&mobile&categoryId=200001173 두산백과 〈남학동〉] 참고</ref> 에서 성장하다가 반정이 일어나자 나의 종 보동이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는, 나를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도망친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지리산]]의 [[상원사]]에서 1년을, 이어 [[묘향산]]의 [[보현사 (묘향산)|보현사]]에서 다시 2년을 지냈으며, 이때 종 보동이 죽었다. 이어 안주<ref>지금의 [[평안북도]] [[안주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9978&mobile&categoryId=1588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주군〉] 참고</ref>에 있는 [[원통사]]로 가서 7일간 지내면서, 그 곳의 스님 죽청에게 내가 왕자였다는 사실을 몰래 말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죽청은 그러한 나를 당시 곽산<ref>지금의 [[평안북도]] [[정주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58634&mobile&categoryId=1588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곽산〉] 참고</ref>에 와있던 궁궐의 종에게 데려갔으나 궁궐의 종은 보지 못하고, 죽청의 동생의 집에서 머문 후 정주<ref>지금의 [[평안북도]] [[정주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7734&mobile&categoryId=1588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주군〉] 참고</ref>에 있는 [[내수사]]의 종 효문의 집으로 갔다. 효문에게 내가 왕자였다는 사실을 말하였는데 효문이 이를 소문내자 그 마을의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였고, 이때문에 결국 효문의 매부 만복의 집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는 효문이 서생 [[홍윤평]]에게 편지를 써 내가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어 홍윤평이 그곳의 목사에게 보고한 후 [[관찰사]]에게까지 이 일이 전해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당시 만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자세히 그 행적을 이야기하는 만손에 대해 놀라워하는 한편, 정말로 그가 왕자가 맞는지 의심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중종 17권, 8년(1513 계유 / 명 정덕 8년) 1월 7일(정축) 3번째기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