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기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06.101.0.89(토론)의 29309767판 편집을 되돌림 |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
||
1번째 줄:
'''단군기원'''(檀君紀元) 또는 '''단기'''(檀紀)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인 [[단군]]의 [[고조선]] 건국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상징적인 기년이다.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기원전
전근대 한민족의 조상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5000년간 지켜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긍심의 표현인 것으로 평가되며, 현대에도 한민족의 상징적·신화적인 기년으로 인정되고 있다.<ref>이은경, 〈국사 교과서의 단군기원 서술에 대한 일고찰〉, 인하대학교, 2002년</ref>
7번째 줄:
|ISBN=978-89-91221-31-4 | 쪽= 285~286}}</ref>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에는 [[제석천]](帝釋天, [[옥황상제]])의 손자 [[단군]]이 제고(帝高)와 같은 무진년에 즉위하여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그 동안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1028년이라 했다. 이러한 이승휴의 연대 기록은 당시의 전근대 역사학의 기준으로도 오류가 있는데, 전근대 역사학에서 공인되었던 기묘년([[기원전 1122년]])을 중심으로 계산하면 《제왕운기》에서 단군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2313년이 되며 이 해는 무진년이 아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1028년을 1048년의 오기로 여기는데, 이렇게 보정하면 무진년([[기원전
한편 단군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 열전 '[[백문보]](白文寶, 1303~1374)'조(條)로,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단군을 언급했다.
13번째 줄:
{{인용문|[[하늘]]의 기수(氣數)는 순환하여 700년이 한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1363년]])까지 이미 3600년이므로 주년(周年)의 기회가 됩니다.}}
여기서 [[백문보]]가 단군이 치세를 시작했다고 여긴 연도는 현재의 단기 원년(기원전
기원전
{{인용문|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고조선|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요 (군주)|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기원전 2333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