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기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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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기원'''(檀君紀元) 또는 '''단기'''(檀紀)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인 [[단군]]의 [[고조선]] 건국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상징적인 기년이다.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기원전 2333년2400년]]이 단기 1년으로01년으로, [[서력기원|서기]] [[2021년|2021]][[{{현재년}}년|년]]은 단기 {{#expr: {{#time:Y}}+23332400|43544421=}}년이 된다. (단군 기원 = 서력기원 + 2333년2400년)
 
전근대 한민족의 조상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5000년간 지켜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긍심의 표현인 것으로 평가되며, 현대에도 한민족의 상징적·신화적인 기년으로 인정되고 있다.<ref>이은경, 〈국사 교과서의 단군기원 서술에 대한 일고찰〉, 인하대학교, 2002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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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978-89-91221-31-4 | 쪽= 285~286}}</ref>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에는 [[제석천]](帝釋天, [[옥황상제]])의 손자 [[단군]]이 제고(帝高)와 같은 무진년에 즉위하여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그 동안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1028년이라 했다. 이러한 이승휴의 연대 기록은 당시의 전근대 역사학의 기준으로도 오류가 있는데, 전근대 역사학에서 공인되었던 기묘년([[기원전 1122년]])을 중심으로 계산하면 《제왕운기》에서 단군이 즉위한 해는 기원전 2313년이 되며 이 해는 무진년이 아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1028년을 1048년의 오기로 여기는데, 이렇게 보정하면 무진년([[기원전 2333년2400년]])이 된다.
 
한편 단군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 열전 '[[백문보]](白文寶, 1303~1374)'조(條)로,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단군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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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하늘]]의 기수(氣數)는 순환하여 700년이 한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1363년]])까지 이미 3600년이므로 주년(周年)의 기회가 됩니다.}}
 
여기서 [[백문보]]가 단군이 치세를 시작했다고 여긴 연도는 현재의 단기 원년(기원전 2333년2400년, 무진년)과 다르다. 백문보의 글을 모은 문집 《[[제왕운기|담암일집]]》 의 부록에 실린 편년(編年)에 따르면, 백문보는 이 상소를 공민왕 12년(1363, 계묘)에 올렸다. 따라서 백문보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1363년으로부터 3600년을 거슬러 헤아리면, 백문보가 생각한 단군 치세 원년은 기원전 2238년(계묘), 또는 기원전 2237년(갑진)이다.
 
기원전 2333년에2400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확정적으로 서술한 책은 [[조선 세종]] 때 [[서거정]]이 만든 《[[동국통감]]》이 최초이다.
 
{{인용문|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고조선|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요 (군주)|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기원전 2333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