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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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년]])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였다.그 후 영조 36년(1760[[1760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경)·辰(진)·地(지)·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수표교는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들었다.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 2단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윗 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난간에 새겨진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이 다리는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 영조|영조]] 36년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마치고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알려 홍수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수표교에 ‘丁亥改造(정해개조)’,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라 새겨져 있어 준설공사가 끝난 후 영조 43·44년(1767·1768년)에 다리를 다시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울의 풍속 가운데 [[정월 대보름]]날 서울 사람들이 밤을 새워 즐겨하였던 답교놀이 때는 이곳이 가장 성황을 이룬 곳 중의 하나였다. 정월 대보름 전 2·3일은 이 수표교를 중심으로 청계천 위·아래에 연날리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 구경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이 다리는 수표석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 남아 있었으나, 1959년의[[1959년]]의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일시 신영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65년에[[1965년]]에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날 수표교가 있던 곳은 수표동(手標洞)과 관수동(觀水洞)이라는 동명과 수표공원이라는 어린이공원이 있어 그 이름만 전하고 있다.
 
== 특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