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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2세기까지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나(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참고 할만한 내용은, 거란(契丹)에서 '契' 글자를 읽은 소리가 다양한 것. 계(契)맺을, 친목 모임을 친목계라 하죠? 상(商)나라 시조 설(契)로도 읽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거란으로도 읽고 있네요. 거란이 동호족에서 파생됐다면, BC300년~249년 연나라 요하 침공 때, 요하 북쪽에 있는 동호와 요하 고조선을 공격해서 요하를 뺏었는데, 단군조선 = 단군(檀君)+조선(朝鮮)으로, 수도 아사달은 요하 강 상류 지역에 있는 현재 조양(朝陽)시, 조(朝)아침은 일본 말로 ''''아사'''' 언덕에 있는 동네를 한국인은 '''달'''동네라고 합니다. 상(商)나라 마지막 수도 조가(朝歌) = 은허(殷墟)유적 역시 허(墟)언덕에 있고, 첫 수도 상구(商丘) 역시 구(丘)언덕에 있습니다. 상나라 왕실 성(姓)은 자(子)아들로, 시조 설족(契族)을 화하족(華夏族) 하(夏)나라가 하대하며 무시하다 탕왕에게 망했고, 바이칼호 아래 설련하(偰輦河)에서 남하한 북방계로 보이고, 화하족 주나라에 BC1122년~BC1046년 망하는 동안, 자성(子姓)에서 파생된 기씨(箕氏) 여(餘)는 주나라 무왕이 반란 후에 감옥에서 풀어줬고, 기자(箕子)가 살던 백적(白狄) 일족을 이끌고 지역을 떠나 요하로 이동, 단군 조선이 만주에서 시작됐는데, 적(狄)오랑캐는 화하족 관점에서 자신들과 다른 이민족이란 뜻이고, 백(白)엄지는 맏형이란 뜻,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선(鮮)고울,로 불렀습니다. 백(白)흰, 하얀색 옷 선(鮮)고운 선을 즐기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조선(朝鮮)은 북쪽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맥(貊)북방 종족에 해당, 예(濊)흐릴, 먼저 살고 있던 단군(檀君)과 이동해 온 기자가 요하에서 예맥, 단군조선을 시작하게 된 상황. 단군조선 수도 아사달 조양은 북방계 동호, 거란, 기자 여(餘)를 잇는 부여(扶餘) 해씨(解氏), 오녀산성 높은 지역에 세운 졸본부여 고구려(高句麗) 역시, 고(高)높을, 여(餘)일 수 있는 것은, 고구려에서 내려가 온조(溫祚)가 세운 남부여 백제 마지막 태자 성(姓) 여(餘)가 당나라에 끌려가 서(徐)로 바뀐 것을 공통 글자에서 알 수 있다. 연나라 요하 침공전까지 단군 조선은 만주에서 공존했는데, 북방계 조선은 요하를 제외한 나머지 만주 지역에서 부여를 세웠고, 기자가 아사달로 이동했을 때 단군이 자리를 내주고 이동한 곳이 요동으로, 단군은 연나라 요하 침공으로 평양으로 남하 100년 후, 위장 귀순한 위만에 평양도 뺏기고 남하 한(韓)을 세웠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단군이 시조가 되고, 부여계 온조에게 한(韓)이 망했지만, 만주 단군 조선에 한 뿌리가 있기 때문에, 단군과 기자는 조선시대까지 시조로 여기고 제사를 지냈지만, 화하족 사마천이 쓴, 사기에 적힌 몇마디에 사대주의로 폄훼, 기자는 우리 역사에서 삭제 됐습니다. 거(契)는 상나라, 조선, 부여, 고구려에서 파생된 북방계로, 상(商)나라 시조 설(契)을 거(契)로 읽는 같은 글자와 흐름에 한국인과 고대사 공통점 있습니다.
 
== 거란의 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