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나 카르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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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gna Carta (British Library Cotton MS Augustus II.106).jpg|섬네일|230px|[[독피지]]에 기록된 마그나 카르타]]
[[파일:Magna Carta (1297 version, Parliament House, Canberra, Australia) - 20080416.jpg|섬네일|[[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사당]]에 마그나 카르타 1297년판이 전시되어 있다]]
'''마그나 카르타''' 혹은 '''대헌장'''(大憲章, {{llang|la|Magna Carta, Magna Carta Libertatum}}, {{llang|en|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잉글랜드의 존|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치주의|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다.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의 시사점은 후대에 국왕과 대립이 발생했을 때 계속 확대 해석된 것이다.
 
본래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Autocratic)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Authority)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Scutage)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되어 금과옥조(Golden section)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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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왕의 실정(Misconduct)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에 압력을 넣어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 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원문에는 개조번호(Article number)가 없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되어 있다. 새로운 요구를 내놓은 것은 없고, 예로부터 관습적인 모든 권리를 확인한 문서로서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 특권의 확인, 지방 관리의 직권 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 사항의 처리 등 여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 다양한 버전 ==
;1215년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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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는 1215년에 러니미드(Runnymede)에서 존 왕이 남작들을 만났을 때 인장을 찍은 단 하나의 원본 문서는 아니었다. 그 합의는 구두로 이루어졌고, 후에 왕의 필경사에 의해 왕의 칙허장으로서 문서로 선서를 하고 확인되었다. 1215년 6월, 전국에 ‘마그나카르타’의 사본을 많이 보냈지만 현재 이들 가운데 4부―영국 도서관에 2부, 링컨(Lincoln) 대성당과 솔즈베리(Salisbury) 대성당 문서보관소에 각각 1부씩 남아 있다. ‘마그나카르타’의 선포는 영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현재 남아 있는 4부는 영국 생활방식의 상징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물로서 지속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ref>{{웹 인용|url=http://heritage.unesco.or.kr/1215%eb%85%84%ec%97%90-%ec%84%a0%ed%8f%ac%ed%95%9c-%eb%a7%88%ea%b7%b8%eb%82%98%ec%b9%b4%eb%a5%b4%ed%83%80/|제목=1215년에 선포한 ‘마그나카르타’|성=UNESCO|이름=|날짜=|웹사이트=유네스코 유산목록>세계기록유산>1215년에 선포한 ‘마그나카르타’|출판사=UNESCO|확인날짜=2020-05-1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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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년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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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귀족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부르주아 시민들에 대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특히 12조에서의 왕의 과세권 제한 내용은 이후에 발생한 [[권리 청원]], [[권리 장전]] 등의 영국 부르주아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영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 에드워드 코크의 견해 ==
[[파일:Edward coke.jpg|섬네일|right|에드워드 코크는 마그나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