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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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병합 조약'''〉({{한자|韓日倂合條約}}), 일본명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llang|ja|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간코쿠 헤이고니 간스루 조야쿠}})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이다.
'''한일 합방 조약'''({{한자|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ref>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책보세 펴냄</ref>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졌고, 이날 일본 제국 천황이 [[s: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건]]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서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권피탈'''({{한자|國權被奪}}), '''경술국치'''({{한자|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하고, [[기유각서]]로 사법권과 감옥사무까지 잃은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한편 병합조약 직후 [[황현]], [[한규설]], [[이상설]] 등 일부 지식인과 관료층은 이를 일방적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늑약으로 보고 극렬한 반대의사를 보였고, [[한일 병합]] 직후 14만 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ref name="shin216">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 216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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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uengbokheon.jpg|섬네일|[[창덕궁]]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한일 병합 조약을 찬성하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옛 건물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을 1920년 중건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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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창덕궁]] 흥복헌<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21009010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 망국의 치욕 감내했던 흥복헌… 슬픈 역사만 오롯이], 서울신문, 2010년 8월 20일</ref>으로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조선귀족)|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1859년)|조민희]] 8명
== 한일 병합 조약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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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일합방]]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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