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푸르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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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푸르 2세''' (309샤리아르 2세, 297~379)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10번째 왕이다황제이다.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수복하기 위하여 337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또한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였으며 아르메니아 지역에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고자 5년여에 걸친 싸움을 벌이는 등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의 치세는 페르시아 문화,예술의 첫번째 흥성기이기도 하였으며, 아라비안 나이트 전설을 낳았다.
 
== 본문 ==
[[호르미즈드 2세]]의 유복자로4번째 태어났으며아들로 태어난태어났다. 해에모후 신하들의[[이프라]]는 추대로[[쿠샨 보위에왕조]]의 올랐다.왕녀로 모후(母后)와[[호르미즈드 2세]]의 후궁으로 들어와 정궁을 폐출시키고 여러 의붓자식들을 죽이거나 추방한 뒤 남편을 독살하고 어린 그를 즉위시킨 뒤 섭정하였다. 대신들의모후가 섭정기간을섭정을 거쳐거둔 325년부터 직접 통치하였다. 337년 샤푸르는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수복하기 위하여 [[티그리스 강]] 건너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것으로 20여 년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던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세력을 키워가자, 자신이 전쟁에 나간 뒤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고 개종하도록 명령하였다. 358년 그가 메소포타미아 북쪽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자, 363년 [[로마 황제 연대표|로마의 황제]]인 [[율리아누스]]가 대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공격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승승장구하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진군하였으나진군하였다. 연이은샤푸르 전투에서2세는 친정하여 부상을율리아누스를 당하여요격하였으며, 죽음을그를 맞았다고대 앗시리아의 땅이였던 니네베에서 격돌하였다. 그의장군 메파이발라타스는 율리아누스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선봉장 클라비에이타스는 율리아누스를 유인하여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웠고, 페르시아군이 대승하였다. 패전을 수습하고 로마의 뒤를제위를 이은 [[요비아누스]]는 30년 동안 휴전할 것과 로마 제국의 5개 주를 양도하기로 약속하였다.
 
샤푸르 2세는 아르메니아 지역에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려고 5년에 걸친 싸움을 벌여 자신의 뜻을 이루는 등 다양한 군사 전술과 외교적인 시도를 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당시에는 [[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이란]] 남서부의 비샤푸르에는 그가 [[로마 황제 연대표|로마 황제]]를 포로로 삼는 전승도(戰勝圖)와 그의 모습이 새겨진 거대한 암각화가 남아 있어 당시의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
 
== 전설 ==
그는 소위 [[천일야화]]혹은 [[아라비안 나이트]]로 불리는 민담집의 원형설화가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전설상으로는 아끼던 후궁과 맏아들의 불륜에 여자들을 불신하게 되어 [[하렘]]의 후궁들을 죽이다가, 유서깊은 귀족 카렌 가문의 지혜로운 [[셰헤라자데]]를 맞이하게 된 뒤 그녀에게 교화되어 그녀와 해로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샤푸르 2세의 치세는 음모와 질투가 난무하고 독살과 모함이 빈번하게 자행되는 궁중암투의 시대였다.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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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309년297년 태어남]]
[[분류:379년 죽음]]
[[분류:고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