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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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토리노 전투'''({{llang|es|Asedio de Turín}})는 [[1706년]] [[9월 7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토리노|토리노 시]]의 서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는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Philippe II, Duke of Orléans), [[루이 다부송 드 라 푀이야드]](Louis d'Aubusson de la Feuillade), 그리고 [[페르디낭 드 마르생]](Ferdinand de Marsin)등 프랑스군의 지휘관은 포로가 되거나 체포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 배경 ==
전쟁이 발발했을 때,
[[1705년]] 8월 프랑스-스페인
== 공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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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중, 도시 인구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지원을 얻은 토리노 시는 공성전에서 강렬한 저항을 개시하였고, 공격자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혔다. 전투는 1706년의 전 여름에 걸쳐 계속되었다.
7월 17일,
==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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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공격은 9월 7일 10시에 공성군의 거의 전 전위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레오폴드 폰 안할트 데사우]](Leopold von Anhalt Dessau)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보병대는 세번의 공격을 시도해 실패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우익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라 마린 연대(regiment La Marine)는 탄약이 다 떨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이상 프로이센 보병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포위망을 형성한, 오스트리아와 사보이아군은 이러한 방식으로 격퇴하였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궤주하기 시작했다. 다운(Daun)이 도시의 수비대에게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좌익에 대하여 공격을 명했을 때,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스스로 살 길을 찾기 위해 도망치다가 극단적으로는 결국 도라 리파리아강에 수백의 병력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같은날 이른 오전에 [[피네롤로]](Pinerolo)를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승리는 남쪽의 전투를 끝내게 하였다. 다음해의 [[툴롱]](Toulon)의 공방전이 실패한 이후에 [[위트레흐트 조약]]
== 새로운 연구 ==
2006년
==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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