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노샤트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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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노는 [[1000년]] 경 카스네시스 영지의 수도로 클뤼니 수도원의 헌장에 언급된다.<ref>[http://ladombes.free.fr/Villes_Dombes/Chanoz_Chatenay.htm Présentation de Chanoz-Châtenay], sur ''ladombes.free.fr''</ref> 이후로는 생마르탱이라는 [[교구]]가 되어 리옹 대주교가 성직록 수여를 맡았다. [[1378년]]에는 [[보죄]] 경이 이끄는 군에게 교회가 약탈당했다. 생마르탱 교구는 봉건질서에 따라 샤트네 공작령에 속하게 되었으며<ref name="Chanoz" /> 이때부터 샤노와 샤트네는 이미 통합되어 있었다.
 
샤트네는 원래 영지였으며 중저급 치안권과 성이 있었다.<ref name="Chatenay" /> 마을명과 같은 이름인 샤트네 귀족이 소유했던 땅이었으며 그 종주권은 바주 경이 지니고 있었다. 샤트네 이후로는 차례대로 펠랑, 몽스페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후자의 경우 [[1573년]]에 퐁드벨 백작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치안권을 부여받았다. 이후로는 사보이사보이아 공작의 소유로 바로 넘어갔다.
 
[[1601년]] [[프랑스-사보이 전쟁|프랑스-사보이아 전쟁]]이 끝나고 [[리옹 조약 (1601년)|리옹 조약]]이 체결되면서 샤노 교구와 샤트네 공작령은 [[프랑스]]령으로 넘어갔고귀속되었으며, [[브레스]], [[뷔제]], [[발로메]], [[페드젝스]]로 흡수되었다. 이후로는 부르귀뇬 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두 지역이 처음으로 하나의 지역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그 행정청은 샤노 마을에 두게 되었다. [[1790년]]부터 [[1795년]]까지는 샤티용르동브 캉통과 [[샤티용르동브 구]]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