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유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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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대립이 있던 중에 [[1303년]] 9월 7일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한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다.<ref>[네이버 지식백과] 아나니 사건 (종교학대사전, 1998. 8. 20.)</ref>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8세를 생포된후생포한 콜로나의 시아라로 부터 빰을 맞는등시아라는 심한 욕설과 구타를 당한다하였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신체적 심한상처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겪던 교황은 한달후에한달 사망하고후에 말았다사망하였다. 이후 교황들은 [[프랑스의 군주|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가 되어 갔다꼭두각시였다.<ref>[네이버 지식백과] 아비뇽 유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아비뇽 유수로 인해 교황권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에 놓여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후 로마와 아비뇽에 2명의 교황이 분립하게 되는 교회의 대분열로 이어지면서 교황권은 더욱 쇠약해지게 되었다</ref> 1305년 프랑스 출신 추기경 베르트랑이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하면서 필립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에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이주하였으며 1309년에 아비뇽에 거처를 두었다.<ref name="ysj 169"/>
 
아나니 사건 이후의 처리를 위해 [[비엔 (이제르주)|비엔]]의 [[비엔 공의회]]([[:fr:Concile de Vienne|fr]])를 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사이에,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7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7세]]의 침략을 받아(1310~1313) 교황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결국 프랑스에 계속 체류하게 되었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왕국의 영내가 아니라 교황의 [[봉신]]인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다. 아비뇽 유수 기간에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교황 또한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체재 중에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성직 또는 사절의 지위에 임명되었지만, 교황청의 부패상과 교황이 로마를 떠나 있는비운 것에 대해심하게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분노했다. 그래서그는 교황에게 종종 로마로의로마로 귀환을 호소하였으며호소하였고, 그의 작품에서는 아비뇽이아비뇽을 서방의 바빌론으로 표현되고 있다표현하였다.
 
1377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드디어 로마로 귀환함으로써귀환하여 유수는 종식되었다종식했다.<ref name="ysj 169">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 2005.12.10 p169</ref> 그러나 곧이어 '[[서구 대이교|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발생하였다.<ref>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 2005.12.10 p170</ref>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음 해인 1378년에 선종하자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신임교황과신임 교황과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간에추기경들 심각한사이에 수준의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아나니에 모여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폰디로 장소를 옮긴후옮긴 후, 제네바 태생 로베르 추기경을 클레멘스 7세로 하여옹립하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7세가 무력을 동원하여 우르바노 6세의 축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아비뇽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청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공존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서방교회의 대분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 아비뇽 유수기의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