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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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909년]] [[12월 3일]]에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상업회의소에서 일진회와 [[대한협회]]의 정견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정견위워회에서는 양측의 합동을 논의했으나 결렬되었고, 저녁 늦게 일진회의 임시총회가 열렸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이 임시 총회에서 "나라와 백성의 형세가 절박하여 황실 존영과 인민 복리를 위해 정합방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국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설명하고, 일진회 회원들은 이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용구는 다음날인 [[12월 4일]]에 100만 일진회 회원의 이름으로 [[대한제국 순종]]과 내각, [[통감부]]에〈[[
이 성명서의 발표와 함께 한일 병합 요구가 공세적으로 일어나면서 대한제국의 여론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크게 분열되어 갈등을 빚었다. 같은 친일 성향의 세력이면서도 일진회 주도의 병합을 반대하는 [[이완용]]과 [[국시유세단]]도 가담했다. 약 8개월 간의 대립 끝에 이듬해 8월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진회의 성명서는 실현되었다.
== 성명서의 내용 ==
정미7조약 체결 이후에는 마땅히 산업을 발전시키고 교육에 힘써야 하건만 "폭도와 비적"으로 표현된 의병 항쟁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권세와 이속을 다투면서 나라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대한제국을 위해 수고를 다한 은혜를 잊기 어려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일본의 여론을 악화시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5백년 사직이 폐허가 되고 2천만 백성도 하나도 남지 않게 될 비참한 지경이라는 것이 일진회의 인식이다. 국가의 재정도 바닥났으며 국가기밀도, 통신수단도, 법률도 한국인의 손에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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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일진회]]
* [[
==
* {{서적 인용
|저자=한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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