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35번째 줄: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변법자강|변법운동]]과 정변 전후 광서 24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한구에서 회담을 가졌다. 점진주의를 중시하는 이토와 뜻이 맞았고, 일본에서 코크스를 수입해 [[야하타 제철소]]에 필요한 철광석을 일본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권학편’에서 일본을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로 본받아야 하며,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일본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1898년에 [[무술변법|변법 운동]]이 일어났고, 그는 변법파가 조직했던 [[자강회대한자강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저작인 근학편(勸學篇)(1898년)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통해 너무 급진적 개혁을 책망했다. 무술정변으로 변법파가 쫓겨나면서 움츠러들었지만, 1900년(광서 26년), [[의화단 운동]] 때에는 당재상 등 자립군의 반란을 진압했다. [[성선회]], [[장젠 (정치인)|장젠]]을 통해 [[유곤일]]과 함께 [[동남호보]](東南互保)<ref>청나라 말기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남쪽의 각 성이 중앙 정부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외국과의 개전을 거부한 사건이다.</ref>를 맺었고, 이듬해 1901년에는 [[유곤일]]과 연명하여 ‘강초회주삼절’(江楚會奏三折)로 불리는 상소를 올려 변법의 조칙을 반포했다. ([[청말신정]])
 
상소문에서 교육 개혁을 주창하여, 1904년에 정부가 〈주정학당장정〉(奏定學堂章程)으로 반포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905년, 과거가 폐지되고, 경사대학당(후 [[북경대학]]) 중심의 근대 교육 정비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