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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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이시영 (1868년)|후임=함태영
}}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운동가이고,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서예가이다. [[전라북도|전라도]] [[고창군|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있고 [[전라북도|전라도]] [[부안군|부안]]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호 (이름)|아호]]는 인촌(仁村)이다.<ref name="in680">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680페이지</ref>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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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 ===
==== 5살 연상 과연상과 결혼 ====
[[파일:줄포리 김성수 생가.jpg|썸네일|왼쪽|150픽셀|부안군 줄포리 인촌 김성수 생가]]
[[파일:송진우.gif|썸네일|오른쪽|180픽셀|오랜 친구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성수의 죽마고우인 그는 죽기 전까지 앞장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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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진우와의 만남 ====
[[파일:Kim Seong-soo and Song Jin-woo.jpg|섬네일|left|150px|친구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ref name="gopyung24">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24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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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계몽 활동 ====
[[파일:Kim seong soo 1914.jpg|섬네일|left|160px|김성수 (1914년 무렵)]]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경성부|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ref name="ill7">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1</ref>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ref name="건국영웅"/>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ref name="ill7"/>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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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준비와 만세운동 계획 수립 =====
[[파일:1918 Joong Ang High School.jpg|썸네일|왼쪽|140px|[[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3.1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중앙고등학교]] 숙직실]]
 
{{참고|제1차 세계대전|파리강화회의|민족자결주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ref name="동아일보"/>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autogenerated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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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전후 =====
[[파일:Songjinwoo1919.jpg|섬네일|left|140px|[[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수감 중인 [[송진우 (정치인)|송진우]]<br> ]]
 
{{참고|3·1 운동}}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ref name="lee585">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85</ref>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조선총독부|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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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류사업 확장과 경성방직회사 창업 =====
[[파일:경성방직1927.jpg|섬네일|right|160px|[[1927년]]의 [[경성방직회사]]]]
 
{{본문|경성직뉴주식회사|경성방직회사}}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기념">《인촌기념회》[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사상과 일화 - 기업운동] {{웨이백|url=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date=20070812233739 }}</ref>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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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ong a-ilbo 19200401.jpg|섬네일|250px|동아일보 창간호]]
[[파일:Kim Seong-soo 1920.jpg|섬네일|left|140px|동아일보 창간 무렵]]
 
{{참고|민족개량주의|동아일보}}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ref>《송건호 전집 08 민주언론 민족언론 1》(송건호, 한길사, 2006) 264</ref>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 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ref name="malss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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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 운동 =====
[[파일:물산장려운동.jpg|썸네일|300px|right|경성 방직 주식 회사의 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
 
{{참고|물산장려운동|국산품 애용 운동}}
 
[[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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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립대학 설립 운동 =====
[[파일:1923년 민립대학 기성회 광고.jpg|섬네일|right|200px|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참고|민립대학설립운동}}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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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 실력양성 운동 =====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ref name="'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8050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ref>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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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나로드 운동 =====
[[파일:브나로드 운동.jpg|left|섬네일|브나로드 운동 포스터]]
 
{{참고|브나로드 운동|계몽주의|문맹 퇴치}}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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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n cheon 1934.jpg|섬네일|right|230px|[[1934년]]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에서, 당시 그는 양부 [[원파 김기중]]의 상중이었다.]]
[[파일:보성전문학교 학생 교련 훈련.jpg|썸네일|오른쪽|200px|[[고려대학교의 역사|보성전문학교]] 학생의 교련 훈련 장면]]
 
{{참고|고려대학교|보성학교|고려대학교의 역사}}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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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후반 =====
[[파일:Chang sihn song.PNG|섬네일|left|150px|[[1936년]] [[영국]] [[런던]]에서<br />(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1899년)|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
 
{{본문|창씨개명|조선어학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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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전쟁 전후 =====
[[파일:USSArizona PearlHarbor.jpg|섬네일|left|[[태평양 전쟁]]|220x220픽셀]]
 
{{참고|태평양 전쟁|진주만 공습}}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33698 "교학사의 '김성수'서술, 위키백과와 90% 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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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행적 논란 ====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통치]]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ref>http://dna.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7%80%EC%9B%90%EB%B3%91%22%2C%22startIndex%22%3A0%2C%22page%22%3A1%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Date%22%3A%221938-01-01%22%2C%22endDate%22%3A%221938-12-31%22%7D</ref>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97#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ref>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ref name="malsso1"/>,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ref>《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4-3권. p43~p9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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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당 창당 조직 =====
{{참고|한민당}}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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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 =====
[[파일:Seoul-Deoksugung-10.jpg|섬네일|230px|right|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본문|신탁통치 반대운동|미소공동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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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각 책임제 =====
[[파일:인촌 김성수 1950.png|썸네일|왼쪽|150px|인촌 김성수 ([[1950년]] 무렵)]]
 
{{참고|내각 책임제}}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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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파일:3731124494 a20ba4f3 c1-2.jpg|썸네일|140px|right|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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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성수 1949.JPG|섬네일|130px|left|[[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 창당 무렵의 김성수 ([[1949년]])]]
[[파일:Kimseongsu 02.jpg|섬네일|140px|right|김성수 초상화]]
 
{{참고|민주국민당 (1949년)|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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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통령 사퇴 ======
[[파일:Kim Seong-soo-South Korean Vicepresident 1951.jpg|썸네일|왼쪽|180px|[[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 재직 시절의 김성수]]
 
{{참고|부산 정치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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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이력 ==
 
* [[1914년]] 귀국 직후 고향과 [[서울특별시|경성]]을 오가며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최두선, 안재홍 등과 교류하며 정치담론을 토론하였다.
* [[1917년]] [[3월 30일]]~[[1918년]] 3월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