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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유년 시절 ===
 
=== 왕비 시절 ===
==== 왕비 책봉 ====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로 뽑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張氏: 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 옥교 사건 ====
 
==== 원자 정호 사태 ====
[[1688년]] [[희빈 장씨|후궁 장씨]](소의 장씨)가 아들 [[조선 경종|윤(昀)]](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 철종|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 복위폐서인 시절 ====
==== 안국동 친정 생활 ====
 
==== 청음사 생활 ====
 
 
=== 복위 후===
==== 복위 과정 ====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조선 숙종|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폐비(민씨)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이에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 장씨|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고 선언하여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였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지만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
 
==== 말년투병과 사망 ====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에 35세로 승하한다. 인현왕후 민씨가 승하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11월 7일]]([[음력 10월 8일]]) 숙종은 [[조선 경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희빈 장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 평가사후 ====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ref>환관과 궁녀|박영규 저|P.364</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