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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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정보
|사건 = 기묘사화<br>己卯士禍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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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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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설명 =
|날짜 = [[조선 중종|중종]] 14년([[1519년]])
|시간 =
|위치 =
|지리좌표계 = <!-- {{좌표|LAT|LON|region:XXXX_type:event|display=inline,title}} -->
|최초 보고자 = <!-- 사건을 최초로 알렸거나 폭로한 사람이나 조직, 단체 -->
|참여자 = [[훈구파]]
|원인 = [[훈구파]]와 [[신진파]]의 갈등
|결과 = [[신진파]]들이 [[훈구파]]에게 살해당하거나 [[귀양]]을 감
|전체 인원 이름 =
|사상자1 = [[조광조]]
|사상자2 = [[김정 (1486년)|김정]]
|사상자3 = 기타 [[신진파]]
|보고된 사망자 =
|보고된 부상자 =
|보고된 실종자 =
|보고된 생존자 =
|보고된 재산 피해 =
|매장지 =
|조사 = <!-- 사건에 대한 조사 여부, 결과 -->
}}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조선 중종|중종]] 14)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남곤]](南袞), [[심정 (1471년)|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조선 중종|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 [[심정 (1471년)|심정]], [[김전]], [[홍경주]],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