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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삼황오제]] 중의 [[염제]]([[신농씨]]), [[황제]]와 그의 아들 [[소호]]가 취푸의 땅을 도읍에 정했다고 한다. 하나라 시대에는 엄국에 속했다. 주나라의 무왕이 주 왕조를 열었을 때, 그 남동생으로 건국 공신이었던 주공 단이 이 땅에 분봉 되어 노공이라 칭했다. 노나라는 아들의 백금에 맡겨 주공 본인은 노에 머무르지 않고 조정에 있어 무왕 사후의 불안정한 정치를 보좌했다고 한다. 이 때 이후로 이 땅은 873년의 긴 세월에 걸쳐 노국의 도성이 되었으며, 주나라 제후의 수도 중에서 가장 길게 영속된 곳이라고 한다. 당시의 취푸는 성벽의 길이가 약 12km로, 사면에 각 3개의 성문이 있었다. 성의 서남쪽은 궁전이나 사당·묘 등 왕의 건축군이 있는 내성이며, 성의 서쪽은 도자기를 만드는 지구, 성의 북쪽은 야금 공업의 지구, 성의 동쪽은 군영, 나머지는 시민의 주거나 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은 주나라 예규을 준수해 〈좌단우사〉(左壇右社), 〈면조후시〉(面朝後市)로 정돈되어 「예절의 나라」로 모범이 되고 있었다.
 
[[file:Confuciusmansionqufu.jpg|left|thumb|250px|공부의 내부]]
춘추시대의 노나라에, 후세에 문성(文聖),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라고 칭하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가 출현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유교」라고 불리며 중국이나 동아시아에 수천 년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공자의 사후 1년 후에 노공은 공자에 대한 제전을 실시했다. 전한시대에 들어가면서 고조 유방은 한층 더 대대적으로 공자를 제사 지내는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공자의 자손들은 취푸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역대 조정으로부터 봉상을 받아 연성공(衍聖公)이라고 하는 칭호를 세습하여, 점차 중국 제일의 명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