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미 요시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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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분]] 4년(1535년), 먼저 덴도씨(天童氏)의 화공으로 황폐해진 릿샤쿠지를 재건시키는 등, 모가미 가문의 영내 부흥에 노력했다. 이 무렵의 모가미씨는 다테씨에게 사실상 복속되어 있었지만, 덴분 11년(1542년)에 다테씨·하루무네 부자 사이에 [[덴분의 난]](天文の乱)이 발생하자 중신 우지이에 사다나오나 야카스 사가미수의 보좌를 받으면서 다네무네카타에 속해 참전하여 하세도 성을 탈환하고 다테씨로부터 독립하여 세력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어 장정군에도 진출했으나 노명씨가 청종방으로 돌아서면서 형세가 역전되자 의수도 청종방을 따라 난은 청종방의 승리로 끝났다.덴분 12년(1543년) 입석사에 히에이잔 엔랴쿠지의 분등을 얻었다.덴분 15년(1546년) 적남 요시미쓰가 탄생한다.이 무렵, 모가미가와 서안에 할거하는 사가에 겸 히로토쇼나이 다이호지 씨의 휘하에서 은연한 영향력을 가진 도사린 선동과 3자가 동맹을 맺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도사린 선동 8월 6일자 사가에덴 앞으로 서신')[3][4].에이로쿠 3년(1560년), 사가에 성주·사가에 카네히로를 공격해 세력 확대에 노력하지만 실패하였다.같은 해 무로마치 막부 1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사신을 보내 적남 요시미츠에게 편휘를 하사하고, 이듬해인 에이로쿠 4년(1561년)에는 답례로 요시테루에게 매를 보냈다.에이로쿠 6년(1563년)에 의광과 함께 상락[5]하고 의휘를 알현했다.이 때 고쇼호[6]로 대응되었다.요시미츠에게 동족인 오사키 요시나오(大崎義直)의 딸을 시집보냈고, 에이로쿠 7년(1564년) 무렵 딸(요시히메)을 다테 데루무네에게 시집보냈으며, 에이로쿠 10년(1567년)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태어났다.
 
[[겐키]]] 원년(1570년)경에 당주의 의수와 적남 요시미쓰 부자 간에 말다툼이 일어나자 요시미쓰는 입석사에 가독 상속을 입원한다[7] 5월에 중신 우지이에 나오나오의 중재로 부자가 화해하고 8월에는 요시미쓰가 가독을 상속했다(다음해 모두 에이로쿠 연간[8]에는 이미 요시미쓰는 은퇴, 출가했다.다음해인 원구 2년(1571년)에 은거 의수는 출가해 「에이린」이라고 호했다.그러나 덴쇼 2년(1574년) 1월, 양자 사이가 다시 험악해지자, 다테 씨로부터의 독립 경향을 강하게 하고 있던 요시미쓰를 억제할 수 있도록, 다테 데루무네가 장인·의수 구원의 명목으로 최상영내에 출병한다(덴쇼 최상의 난).텐도 요리사다·시라토리 나가히사·쿠라마스 요리마·노부사와 미츠노부등이 의수·테루무네에 동조, 요시미츠파의 사가에씨를 공격한다.사가에 씨도 요시미쓰 측을 따라, 요시미쓰가 유리하고 화목이 되었지만 요시미쓰는 적대 세력을 개별적으로 격파하고, 사가에 씨도 다시 요시미쓰를 찾아뵙는다[10].9월 10일에는 요시미츠에 유리한 화의가 다테 씨와 성립해 다테 씨도 철병했다.
 
그 후에도 요시미쓰와 요시미쓰의 대립은 계속되었지만, 11월에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長久)의 중개로 화의(和議)가 맺어졌으며, 의수는 보리사 류몬지(龍門寺)에 은거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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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휘를 준 인물 ==
우지이에모리토* 우지이에 모리토 (氏家守棟, 정직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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